[천자칼럼] 기업인의 문학잡지 살리기

입력 2024-08-01 17:30   수정 2024-08-02 01:00

“우리는 역사와 문화의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가는 이 작은 잡지를 펴낸다. 그리하여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들에겐 창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1972년 10월 월간 ‘문학사상’ 창간호에 실린 고(故) 이어령 선생의 창간사 ‘이들을 위하여’의 일부다. 창간 산파이자 13년간 주간을 맡은 그는 문학사상을 ‘현대문학’ ‘창작과비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대표 문예지로 키워냈다. 창간호 초판 2만 부가 1주일 만에 다 팔려 다시 찍어야 했던 문학사상은 5년 뒤엔 그해 가장 탁월한 작품을 선정해 수여하는 ‘이상문학상’도 제정했다. 소설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은 시나리오 작가로 외도 중이었다. 그의 재능을 사랑한 이어령 선생은 고급 호텔에 방을 잡아주고 감시역까지 붙여 작품 집필에 매진하도록 독려했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1호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울의 달빛 0장>이다. 그 뒤 오정희, 박완서, 이문열, 한강, 김영하 등 국내 대표 작가들이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문학을 꿈꾸는 많은 신인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신인상을 통해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수백 명의 문인을 배출했다.

하지만 문학사상은 문학조차도 무거움 대신 가벼움을 좇는 세태의 변화를 이기지 못했다. 한때 1만 명을 넘던 정기구독자가 수백 명으로 쪼그라들어 적자가 쌓였다. 결국 이상문학상을 다른 기업에 넘기고 618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간 게 지난 4월이다. 이대로 오랜 발자취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나 싶은 순간에 “문화는 경제의 산물”이라는 소신을 가진 기업인이 손을 내밀었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다. 이 회장이 사재를 내 설립한 출판사인 우정문고가 문학사상을 인수해 오는 10월부터 복간하기로 했다. 창간 후 정확히 52년 만의 제2 창간이다. 직원 자녀 1인당 1억원의 출산장려금을 지원하는 등 통 큰 사회공헌으로 주목받았던 이 회장이 이번에는 우리 사회의 문화 퇴보를 막았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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