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여름방학은 길고, 돌이켜보면 쏜살같이 빠르다.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어떤 풍경과 경험을 선사할 것인가. 고민된다면 충남 공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아이의 살갗에, 가슴에 오롯이 기억될 그 유쾌한 한 장면을 위하여.
공주 여행 1순위는 공산성
공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에 올라 공주를 바라본다. 공산성 아래 시가지 풍경은 백제의 얼과 의지가 새겨진 공산성을 지지하듯 과하지도 모나지도 않게 어우러진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과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을 맞아 지난 2021년 9월 금서루 앞의 회전교차로에 무령왕 동상이 건립되었다.
무령왕은 서기 521년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에'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驪 更爲强國)을 선언한 국서를 보낸다. 백제가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뜻으로 양나라 정서인 양서 '백제전'에 이러한 핵심 내용이 기록되었다.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기(475∼538)를 대표하는 산성이다. 고구려에 한성(서울)을 빼앗긴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혼란한 정국을 수습했으며, 무령왕 대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고 백성의 생활도 풍요로워졌다. 이 시기를 가리켜 백제 웅진시기(475∼538)라 일컫는다.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으로 남문 진남루, 북문 공북루가 남아 있고, 1993년 터만 남아 있던 동문 영동루, 서문 금서루를 복원했다. 성벽에는 무령왕릉과 왕릉원 6호분에 남은 사신도를 재현한 깃발이 나부껴 공산성의 위엄을 더한다.
마침내 왕이 깨어났다
표고 약 120m에 달하는 송산 남쪽 경사면에 백제 웅진시기에 조성된 7기의 고분이 자리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없어 1호분, 4호분 등의 번호로 불렸고, 1963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으로 일대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난 1971년 6호분 무덤의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다른 고분들과 달리 도굴의 흔적도 없이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잠들어 있던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발견되던 순간이다.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무령왕릉은 연꽃무늬 벽돌을 가로세로로 쌓아 천장을 아치 형태로 마무리한 벽돌무덤이다. 침수를 막고자 배수로까지 갖춘 널길에는 왕과 왕비를 지키고 선 석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묘지석 2장이 나왔다.
널방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목관에서는 관꾸미개, 금뒤꽂이, 금귀걸이, 금동신발, 목제 베개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백제 유물 총 108종 2906점이 발견되었다. 특히 무령왕의 생전 이름인 사마왕과 돌아가신 연대가 적힌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을 찾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삼국시대 왕의 무덤 중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으로, 국가유산청은 지난 202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사적 명칭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변경했다. 훼손 우려로 1997년 영구 비공개가 결정된 무령왕릉의 신비로운 모습은 공주국립박물관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 조형물을 세워 시선을 사로잡고, 웅진백제실에서는 백제의 공예 기술이 집약된 무령왕릉 출토품을 가까이 볼 수 있다. 어린이 눈높이에서 백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웅진백제 어린이체험실을 비롯해 충청남도역사문화실, 충청권역 수장고 등에서 구석기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충남 지역의 역사 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
(사진 = 이효태 포토그래퍼)
정상미 한경매거진 기자 vivi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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