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출간된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속에서 86세대는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란 말을 반복한다. 동구권 몰락과 함께 저물어버린 운동의 시대를 되돌아보며 허무를 곱씹는다. 이 시집은 86세대의 혼란과 상처를 담은 ‘후일담 문학’의 정점이었다.
그 후 30년,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에서 86세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정적을 공격하려 대통령 탄핵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이용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권력을 욕망하며 고함 지르고 울부짖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돌풍’은 86세대에 대한 서사라는 분모를 공유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들은 당시 서른 전후에서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돌풍’은 지난 30년간 86세대가 쌓아 올린 부채에 집중한다.
드라마 전반부의 주요 악역은 시해당하는 현직 대통령이다. 인권 변호사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고, 대통령 재임 시절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들의 사모펀드를 불법적으로 지원하고, 이를 파헤치려던 같은 당 국회의원을 살해하기도 했다. 대통령 장례식에서 소녀 중창단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저항의 상징이었던 이 노래는 ‘돌풍’에서 처음으로 악인의 죽음을 기리는 장치로 쓰인다.
대통령 편에서 각종 비리를 저질렀던 운동권 출신의 경제부총리는 추모사를 낭독한다. “잊지 않겠다”고 하고 “누구도 남은 가족들을 모욕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비리 주범을 편든다. 관련 검찰 수사에 대해선 “검찰 독재 반대”라는 구호도 외친다. 이 같은 모습에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동조한다. 드라마 후반부에선 특정 정치 세력의 요구로 집회를 기획하는 노조도 등장한다.
극적 재미를 위해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그간 86세대가 현실 정치 주류로 활동하며 보여준 모습이 곳곳에 뒤섞여 있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 국정 난맥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 18대에 상당수가 낙선한 86세대 정치인은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계에 대거 복귀했다. 이처럼 86세대는 2000년 이후 나타난 한국 정치사의 여러 변곡점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해 왔다. 사건 자체를 자신들이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은 ‘돌풍’과 다르지만,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현란한 순발력으로 경쟁자의 허를 찔렀다.
기자가 2006년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시작한 86세대는 실제로 기존 정치인들과 달랐다. 당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동교동계 등 기존 정치인을 압도하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각 사안이 기저에 깔린 모순을 꺼내고 활용해 상대를 공격·제압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과정에 명분을 덧입혀 대중에게 호소하는 역량 역시 뛰어났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우리가 옳기 때문에 결국 승리할 것이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똘똘 뭉쳤다. 한국 현대사를 ‘민주와 반(反)민주’의 구도로 인식하며 보수세력에 대한 승리를 위해 기존 통념이나 규칙을 깨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박동호(설경구)와 정수진(김희애), ‘돌풍’ 속 두 주인공은 서 있는 곳이 다르지만 모두 86세대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돼 버렸습니다. 세상의 불의에는 분노하지만 자신의 불의에는 한없이 관대한 괴물!”
“전직 대통령을 성역화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의 유산 싸움 아닙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보다 세상의 변화를 자기 생애에 마무리하려는 자들이 더 위험하다.”
하지만 드라마의 핵심인 86세대의 모순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 정수진의 입을 통해 축약된다. 드라마 중반, 자신을 비리의 사슬에 옭아맨 전대협 의장 출신인 남편을 향해 외치는 말이다. “내가, 당신이 박동호여야 했어.”
운동권에서 정치 주류로 86세대가 탈바꿈하는 지난 30년 동안 처음의 지향은 실종됐다. 권력 투쟁을 위한 기법과 술수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2016년 광장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대중이 2022년 ‘운동권 정치 청산’ 슬로건에 힘을 실었던 이유고, ‘돌풍’에서 그들이 그렇게 싫어했던 기득권 세력과 같은 선상에서 비판받는 이유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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