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가 본인 확인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면 스미싱(문자를 이용한 금융범죄) 피해자가 도용된 명의로 생긴 대출금을 갚을 의무가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금융회사가 화상 통화 등 더 엄격한 본인 확인 절차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정부 가이드라인에 맞춰 설계한 온라인뱅킹 시스템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금융사에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올해부터 은행권의 비대면 금융사기 자율배상제도가 시행된 가운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보험사 증권사 등 다른 금융권으로도 배상 책임이 확산될지 주목된다.
A씨는 지난해 3월 악성코드가 내장된 모바일 청첩장 문자메시지를 받아 클릭했다가 개인정보와 금융정보가 유출됐다. 스미싱 조직은 A씨 금융정보로 케이뱅크에서 계좌를 개설해 30분 만에 8150만원을 대출받았다. 미래에셋생명에서도 958만원을 대출받았다. 농협은행에선 주택청약종합저축을 해지해 1300만원을 빼돌렸다. 스미싱 조직의 인출책은 지난 2월 수원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A씨는 케이뱅크 등을 상대로 대출금을 갚을 의무가 없고, 주택청약통장에서 빠져나간 돈은 은행이 반환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금융사들은 원고가 문자메시지를 눌러 개인정보를 제공한 과실이 있다고 맞섰다.
이에 1심 재판부는 신분 확인 절차 소홀은 전적으로 금융회사 책임이라며 100% 책임을 물었다. 금융회사들이 항소를 제기해 2심에서 다시 판단을 받을 예정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정한 가이드라인을 다 지키고 신분증 진위 확인 보안도 강화하고 있는데, 비대면 금융사기를 금융회사 책임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는 모바일신분증 확대 등 편의성을 계속 높이라고 하면서도 금융당국은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하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올해부터 은행권에서는 비대면 금융사기 발생 시 일부 배상하는 자율배상제도가 시행 중이다. 보이스피싱, 스미싱 등을 통해 개인정보가 유출된 후 제3자에 의해 본인 계좌에서 금액이 이체되는 등 금전 피해가 발생하면 은행이 일정액을 배상하는 제도다. 금융감독원이 시중은행 19곳과 합의한 ‘책임분담기준’에 근거한다. 이 기준이 보험사, 저축은행 등 다른 금융회사로 확산될지가 관건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비대면 금융사고 책임분담기준은 은행, 보험, 증권 등 업권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라며 “스미싱 수법 고도화에 따라 금융회사들이 보완할 부분이 있는지 소관 부서에서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권용훈/허란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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