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인류를 먹여 살린 과학式 돌아보기

입력 2024-08-09 17:32   수정 2024-08-10 01:25

분뇨(똥과 오줌)는 동서고금에서 천연 비료로 쓴다. 질소 칼륨 등 식물 생장에 필요한 원소가 풍부해서다. 비료의 주성분인 질소는 20세기 이전엔 인위적으로 얻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분자를 이루는 2개 원자 간 결합이 너무 단단해 끊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학식으로 하버-보슈법이 꼽힌다. 질소를 분해해 인공 비료인 암모니아를 대량 합성하는 길을 열면서 식량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높였기 때문이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질소와 수소를 섞고 촉매로 철을 넣은 다음 400~500도에서 200기압 이상을 가하면 암모니아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버-보슈법이 없었다면 인구 절반이 계속 굶어 죽어 산업 발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26년 등장한 피셔-트롭슈 합성법도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정도가 하버-보슈법 못지않다. 피셔-트롭슈법은 일산화탄소를 석유로 바꾸는 기술이다. 수소와 일산화탄소를 섞고 철 니켈 등 촉매를 넣으면 탄화수소가 나온다. 이걸로 디젤이나 제트 연료 등을 생산하는 게 피셔-트롭슈법이다. 2차 세계대전(1941~1945년)이 공중전이 된 것도 이 방법 덕이다. 전투기와 폭격기 연료 조달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기술계에서 하버-보슈법과 피셔-트롭슈법이 20세기 이상으로 다시 활약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가오는 수소 경제 시대를 맞아서다. 사계절이 뚜렷하던 한국 날씨에서 봄, 가을이 옅어졌고 여름은 동남아시아처럼 변했다.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한 탄소 저감은 발등의 불이 됐다. 이 불을 끄기 위해선 원자력과 수소가 필요하다.

수소 경제의 출발점은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전해조 기술이다. 전해조 가운데 가장 효율이 높은 것은 고체산화물전해조(SOEC)다. 생산 다음엔 유통이 관건이다. 수소는 운반이 까다롭다. 현재는 부피가 큰 고압 기체 그대로 운반하는 게 보통이다. 부피를 줄이려면 극저온 액화하거나 담체(운반체)를 써야 한다. 담체 가운데선 암모니아가 가장 훌륭한 수단이다. 하버-보슈법이 수소 경제 시대의 화폐인 수소를 운반하는 ‘지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갑에선 비료를 꺼낼 수도 있다. 오스트발트법이란 화학식을 이용하면 된다. 암모니아를 산화시켜 질산을 얻는 방법으로 1902년 등장했다.

하버-보슈법과 SOEC, 피셔-트롭슈법은 궁합이 그야말로 끝내준다. 하버-보슈법은 공정 과정에서 기후 변화의 주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단점이 있는데, SOEC는 이를 일산화탄소와 산소로 분해한다. 피셔-트롭슈법은 일산화탄소를 디젤이나 우주 발사체(로켓) 연료인 케로신으로 전환한다. 유럽 2대 철강기업인 티센크루프는 유럽 최대 산업기술 연구소 프라운호퍼와 함께 하버-보슈법, 피셔-트롭슈법과 연계한 SOEC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제철소에서 나오는 막대한 탄소를 없앨 수소환원제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봤다. 수소환원제철은 포스코가 사활을 건 미래 기술이다.

하버-보슈법과 피셔-트롭슈법, 오스트발트법은 모두 독일 과학자의 머리에서 나왔다. 100여 년 전 독일의 기초과학이 21세기 수소 경제 시대를 맞아 화려하게 귀환한 셈이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이 목매는 극자외선(EUV) 공정 장비도 200년 과학기술이 축적된 독일 기업 자이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한다. 네덜란드 ASML은 이 장비를 커스터마이징해 판매하는 역할을 한다. 핵심 기술은 모두 자이스가 보유하고 있다. 독일이 세계 3위 경제대국을 유지하는 비결은 이런 과학기술의 힘에서 나온다.

한국 과학자들은 후대에 독일처럼 회자될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가. 새 장관이 이끌 윤석열 정부의 2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런 물음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과기정통부는 산하 연구소 간 연구개발(R&D) 칸막이를 없애겠다며 ‘글로벌 톱(TOP) 전략연구단’ 다섯 곳을 선정했다. 이 중 한 곳은 SOEC와 같은 수전해 기술을 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과기정통부는 지난 7일 이 사업을 백지화했다. 연구단장이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후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를 들었다. 수전해 기술이 미래 산업에 가져올 파급력을 볼 때 부적절한 대응이다. 이번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R&D 선진화는 이런 근시안으론 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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