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손톱만 한 반도체 칩을 에어컨 앞에 세워뒀다. “에어컨 켜. 온도 내려. 다시 올려줘.” 사용자의 말 한마디에 에어컨은 즉시 반응했다. 가전제품 리모콘 조절 시대의 종말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최원 어보브반도체 대표는 지난 16일 서울 대치동 사무실에서 “사용자의 음성을 이 칩이 학습하고 모델링한다”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와 사용자의 목소리를 구분할뿐 아니라 가족 목소리만 인식하게끔 설정할 수도 있는데 이 칩을 가전 안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어보브반도체가 지난달 기존 MCU에 내장형(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 기능을 탑재한 칩을 선보이며 글로벌 시장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 대표는 “기존 가전제품 리모콘이나 홈 사물인터넷(IoT)에도 음성 인식 기능이 있지만 인식률이 낮은 편”이라며 “이번에 나온 칩은 AI 기능이 탑재돼 90% 이상의 인식률을 자랑한다”고 강조했다. 이 제품은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간다.
어보브반도체가 국내 최고 MCU 전문 팹리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삼성전자와 중국 시장이 있다. 최 대표는 반도체 설계 관련 연구개발(R&D)못지 않게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산업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는 “삼성전자 생활 가전은 미국 일본 MCU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공급망 관점에서 경쟁력 있는 국내 회사가 있으면 좋을 것으로 판단해 우리가 내실을 다져왔다”며 “2011년 삼성반도체에서 MCU 공급 중단을 선언했을 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지금까지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세계 가전시장을 제패하면서 어보브반도체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최 대표는 창업 초기인 1998년부터 중국 시장에 과감히 진출해 안정적인 수익 창출 구조를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도 지역 반도체 회사가 있지만 기술력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며 “반면 우리 MCU는 유럽, 일본, 미국 보다 기술적으로 뒤지지 않으면서 가격은 합리적이니 중국 시장에 포지셔닝을 하기 좋았다”고 부연했다.
어보브반도체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1254억원, 영업손실은 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온 반도체 경기 불황 여파가 1분기까지 이어졌고, 2분기부터 흑자전환에 성공하며 반등했다. 최 대표는 “글로벌 MCU 시장 규모가 30조원”이라며 “AI MCU를 들고 가전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설뿐 아니라 이를 접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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