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성 "'젠틀맨스 가이드', 정성스런 오마카세…행복하게 맛보시길" [인터뷰+]

입력 2024-08-19 08:10  


1명의 배우가 무려 9명의 배역을 소화한다. 단 15초 만에 의상, 가발, 분장을 바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무대로 올라오면 객석에서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능청스럽게 연기를 시작하면 이내 '빵빵' 웃음이 터진다.

물 위를 초연하게 떠다니는 오리의 수면 아래 다리는 그 누구보다 바삐 움직인다던데, 관객들의 웃음을 책임지는 완벽한 무대 뒤는 그야말로 전쟁일 것 같은 작품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이하 '젠틀맨스 가이드')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바쁜 오리는 누구보다 1인 9역을 연기하는 다이스퀴스 역일 테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가 어느 날 자신이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가문의 백작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다.

다이스퀴스를 연기하는 배우는 은행장 애스퀴스 다이스퀴스 1세부터 성직자 에제키엘 목사, 시골의 대지주 헨리, 자선사업가 레이드 히아신스, 멋쟁이 애스퀴스 다이스퀴스 2세, 보디빌더 바르톨로매오, 하이허스트의 여덟 번째 백작 애덜버트 경, 배우 레이디 살로메, 청소부 천시까지 쉴 새 없이 변신한다.

2021년 세 번째 시즌에 이어 또다시 '젠틀맨스 가이드'에서 다이스퀴스로 출연 중인 정문성을 최근 서울 강남구 모처에서 만났다.

정문성은 '젠틀맨스 가이드'를 오마카세에 비유했다. 그는 "뭔지 모르겠어도 코스 중에 하나니까 나오면 '먹어봐야겠지' 하는 생각으로 먹긴 먹어야 하는 거다. 오마카세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드냐. 고민할 틈 없이 자극적으로 맛있고 재밌는 걸 한 사람이 계속 나와서 보여준다. 복잡하고 고민스럽지 않게 우리가 요리해드릴 테니 와서 보시라고 만든 것"이라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네 번째 시즌에 또다시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 전 시즌에 했던 내 코스가 썩 시원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요리를 바꿔보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조금 더 손에 익은 맛있는 요리를 하고 싶었어요. 그전에는 빨리 만들어야 해서 만들면서 흘리거나 못 생기게 만들었다면, 이젠 그걸 정리해서 내놓고 싶었던 거죠. 지금 그걸 하는 중입니다."


정문성은 '젠틀맨스 가이드'의 매력을 "내용에 디테일하게 들어가서 이게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앞에 펼쳐주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웃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몬티 나바로가 다이스퀴스 후계자들을 한 명씩 죽인다는 단순한 스토리가 재미있게 표현됐으니 관객은 편하게 웃으며 이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설명이었다.

다이스퀴스 후계자들은 어딘가 하나씩 나쁜 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몬티 나바로의 행위에 당위성을 준다. 관객들이 맘 편히 웃으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굳이 심오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오히려 그래야만 극을 더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관객으로서는 더없이 부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두 배로 부담되는 작업일 수 있다. 부지런히 9개의 캐릭터로 변신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웃음'을 줘야 한다는 숙제까지 있기 때문이다. 정문성은 "사실 이 공연을 할 때 제일 힘든 부분이 누군가를 웃겨야 한다는 거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관객분들은 계속 새로운 분들이 와서 보는 거고, 다시 본다고 해도 며칠 지나면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같이 연기하는 원 캐스트 친구들이 내 코미디에 익숙해져 갈 거라는 게 문제였다"면서 "몸이 떨릴 정도로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면 시너지를 받아서 더 연기하게 되는데 그게 익숙해질 때쯤에는 힘들어진다. 계속 똑같은 것만 하면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질 거고, 그들이 힘들어하면 관객이 재미를 덜 느낄 것 같아서 가장 큰 고민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나랑 연기하는 게 즐거웠으면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중간에 계속 다른 것들을 하게 되더라. 공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여러 가지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최대한 준비를 많이 해보고 하나를 정하지 않은 채 가서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내가 되어서 어떤 말이든 행동이든 하자는 주의다. 그러려고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2007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해 어느덧 18년 차가 된 정문성은 영화·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꾸준히 연극·뮤지컬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는 "난 무대에서 시작했고,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연극배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것, 원래 하던 게 무대였다"면서 "무대는 나를 단련하고 스스로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몇 시간 동안 그 공간을 책임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는 배우한테는 사라져선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고 말했다.

"제가 연기하는 그 공간을 책임지고 장악할 수 있어야죠. 그게 앵글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 시간 정도는 다 쏟아부어서 집중할 수 있는 정도의 집중력, 능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속 연구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공연은 제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거지만 사실 제게 배우로서도 연기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요즘은 데뷔 초 학전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던 시절이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차비조차 없던 시절, 정문성은 학전에서 공연하며 가수 고(故) 김민기가 주는 밥 한 끼를 먹고 배우의 꿈을 이어갔다. "선생님은 꼭 밥을 주셨다. 학전에서 차비와 밥 한 끼를 줬다"고 회상한 그는 "그때는 몰랐는데 배우로서 갖춰야 할 기초가 그때 많이 생겼다"고 했다.

이어 "무언가 잘못되고 부족해도 무대 위 배우는 어쨌든 해내야 한다. 요즘 무대 들어가기 전에 항상 '선생님 오늘도 제가 해내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때 이걸 까먹고 소리를 지르는데 목이 아프면 지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다시 옛날처럼 열심히, 바보처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젠틀맨스 가이드' 무대에서 1인 9역으로 혼신의 힘을 쏟아내고 있는 그는 인터뷰 말미 "나 말고 거기 나오는 모든 앙상블이 1인 다역을 한다. 또 내가 옷을 엄청나게 빨리 입는다고 생각할 테지만 앙상블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많이 갈아입는다"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노고를 강조했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무대 뒤에서 모두가 미친 듯이 움직여서 한 장면 한 장면을 만들어 내요. 정성이 가득한 장면들인 거죠. 생각할 시간을 주고 고민할 여유를 주는 정적인 작품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손발이 안 보일 정도로 준비해서 나오는 소중한 장면들을 와서 편안하게, 재밌게 보시면 아마 그날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끝나는 날까지 열심히 움직이겠습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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