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강은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발원해 남쪽 카스피해까지 약 3500㎞를 흐른다. 드넓은 평야를 찾아 여러 민족이 모여든 만남의 장이었고,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였다. 농민 반란, 전쟁, 내전이 벌어진 폭력의 장소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억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자넷 M. 하틀리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 명예교수가 쓴 <위대한 볼가강>은 볼가강을 통해 7세기부터의 러시아 역사를 탐구한다. 저자는 “볼가강 없이 러시아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볼가강은 러시아 심장부를 관통하는 러시아인들의 젖줄이자, 땅이 정복되고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는 격변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책은 볼가강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발전을 체계적으로 조명하고, 볼가강이 러시아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여느 나라가 그렇듯 러시아도 처음엔 영토가 크지 않았다. 1200~1500년대 모스크바 대공국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땅은 모스크바 인근과 북쪽으로 한정됐다. 그러다 점점 영토를 넓혔다. 가장 손쉬운 길은 볼가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영토 확장과 함께 여러 민족이 편입됐다. 러시아는 순수한 슬라브족의 나라가 아니다. 타타르족, 추바시족, 모르도바족, 우드무르트족,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볼가강 유역을 편입한 결과다.
확장한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자국민 이주다. 러시아도 그랬다. 많은 러시아 농민이 강제로 강 중류와 하류 지역에 정착했다. 지주들이 비옥한 땅을 노리고 자기 농노를 이곳으로 옮겼다. 1719년 그 수가 거의 50만 명으로 늘어났고,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인이 볼가강 중류 인구의 64%, 하류 인구의 71%를 차지했다.
볼가강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비슷한 면이 많다. 부와 성공의 기회가 있는 곳이지만,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았다. 볼가강을 따라 강도와 해적이 출몰했고, 여행자와 상인들이 약탈당했다. 유목민이 정착민 마을을 습격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러시아 제국 8대 황제인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때가 돼서야 이곳에 강한 통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뒤 지방 행정력 강화로 눈길을 돌린 그는 지방 관리의 수를 대폭 늘렸다. 18세기 러시아는 유럽 다른 국가보다 공무원 수가 현저히 적었다. 1763년 러시아 중앙·지방 공무원은 약 1만6500명인데, 영토 면적이 러시아의 1%도 안 되는 프로이센은 약 1만4000명이었다. 또 예카테리나 2세는 볼가강에 러시아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소수 민족의 자취를 없애고 러시아식 건물을 지었다. 비러시아인도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써야 했고, 러시아인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서부 유럽과 맞먹을 정도로 문화가 발달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볼가강 지역을 낮잡아 봤지만, 볼가강 인근은 운송의 이점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달했다. 19세기 수로 무역의 3분의 1이 볼가강을 통했다. 1895년엔 러시아 증기선의 50% 이상이 볼가강을 오갔다. “하나같이 번영하고 부유하며 점점 더 크고 아름다워지는 볼가의 도시들은 모두 어머니 볼가 덕분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배가 뒤덮은 장엄하고 매력적인 볼가여!”라는 당시 기록은 과언이 아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벌어진 내전에 볼가강도 휘말렸다. 공장이 많았고, 운송의 중심이었기에 볼셰비키의 적군과 이에 대항한 백군이 모두 볼가강 지역을 노렸다. 처음엔 백군이 우세했지만, 결국 적군이 승리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오던 백군이 볼가강에서 합류하지 못한 것이 내전 결과를 크게 좌우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볼가강 거점 도시인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려고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러시아의 남북 운송을 끊을 수 있었고, 소련군을 강 동쪽으로 몰아내면 방어선을 구축하기 쉬웠다. 반대로 소련군은 탈환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수에 매달렸다.
볼가강 유역은 여전히 러시아의 농업과 산업 중심지지만, 옛날만큼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 철도 등장 후 수로 운송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국가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이다. 소련 통치하에서 공장 폐수가 마구 버려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가진 보물을 아끼지 않은 채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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