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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중국 주은래 총리가 1970년 일본과의 무역회담에서 “한국과 대만에 투자하거나 기술 원조를 해준 기업은 중국과 거래할 수 없다”는 선언까지 하고 나섰다. 일종의 ‘공급망 봉쇄’ 였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일본 투자기업들의 동요는 극에 달했다. 경제·안보의 복합위기에 빠진 박정희는 사면초가였다. 1971년 대통령 신년사에 처음으로 자주국방이 등장한 것은 비장한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자국 이익을 위해서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시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냉혹한 국제질서다.
자주국방이 말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술도, 전문인력도, 자금도 없었다. 박정희 시대 최고의 경제관료로 손꼽혔던 오원철 경제수석이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 육성과 연계하자는 ‘발상의 전환’을 제안했다. 유사시 언제든 군수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철강 기계 조선 자동차 산업 등을 중점 육성하되 민간 기업을 선정해 하나씩 맡기자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탱크 국산화와 철도 기관차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맡았다. 현대모비스의 전신인 현대정공은 당초 전차 생산을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항공과 자주포는 삼성정밀을 보유하고 있던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돌아갔다가 지금은 한화로 넘어갔다. 포탄업체로는 풍산금속이 선정됐다. 당초 식기용 구리를 만들던 이 회사 창업자 류찬우 씨는 박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에 방위산업체로 변신했다.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아 풍산은 중견그룹으로 성장했고 아들 류진 씨는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 재계를 대표하고 있다.
방위산업 육성의 백미는 1970년대 중반에 조성된 경남 창원 기계공업단지였다. 방위산업과 자동차 부품업체들이 결집한 복합 공단이었다. 수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되는 자동차산업과 첨단 기계공학이 필요한 무기 생산은 기술적 시너지가 컸다. 기관총 등의 화기를 제조하는 S&T그룹이 창원에서 자동차부품까지 만들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탱크 자주포 장갑차 항공엔진 수출산업으로 무장한 창원은 ‘방산특별시’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1978년 주한미군 철군 최종 검토를 위해 미 하원 군사위원회가 창원을 전격 방문했다. 그리고 돌아가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국은 이미 자위력을 확보했으므로 미국의 우방으로 남겨두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 만약 창원이 북으로 넘어가면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는 1979년 추가 철군을 공식 철회했다.
아무런 시련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도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재앙과 파괴와 창조는 동행하는 것이다. 불행은 극복하면 더 이상 불행이 아니다. ‘불행의 가면을 쓰고 있는 축복(bless in disguise)’이다. 지난 광복절에 많은 국민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논란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진정한 해방을 곱씹어 보았다.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그 뒤로 80년간 펼쳐진 국민들의 위대한 투쟁과 기적의 역사를 말이다. 방위산업 굴기 말고도 앞선 세대를 자랑스럽게 추앙하고 현 세대를 당당하게 만드는 해방일지들이 널려 있다. 시시한 친일·반일 논란은 집어치워야 한다. 이렇게 위대한 국가를 건설한 우리가 과거 불행으로 끌려들어가 서로 물고 뜯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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