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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해 널리 사랑받는 화가들의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냥 봐도 독특하고 즐겁지만(대중성), 배경지식과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면 더 깊은 매력을 느낄 수 있다(예술성)는 것이다. 지금 현대미술계에서는 스위스 출신 작가 니콜라스 파티(44)의 작품이 그런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 속 부드러운 색감과 선은 언뜻 봐도 예쁘다.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파스텔의 독특한 질감과 함께 작가의 기묘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찬찬히 작품을 감상한다면 삶의 무상함과 같은 심오한 주제, 미술사 속 명작들에 대한 파티의 독창적인 재해석을 읽어낼 수 있다. 파티의 작품이 대중과 미술평론가들 사이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이유도,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이 미술관 역사상 최초의 생존 작가 개인전으로 파티를 택한 것도 이런 다층적인 매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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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은 현대미술에서 잘 쓰이지 않는 재료다. 물감이 마르면 고쳐 그릴 수 있는 유화와 달리 한번 작업하면 끝인 데다 연약해서 잘 부러지고 가루가 날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에 매력을 느꼈다는 게 파티의 설명이다. “삶도 예술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아름답지요. 먼지처럼 훅 불면 날아가는 파스텔은 그 사실을 상징하는 재료입니다. 나는 나를 ‘먼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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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가 주로 다루는 주제가 삶과 죽음, 자연의 순환과 같은 ‘사라지고 변하는 것’과 관련돼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름 풍경’ ‘가을 풍경’ 등 사계절을 그린 풍경화는 자연의 순환을, ‘부엉이가 있는 초상’은 삶과 죽음 등 생명의 순환을, ‘아기’와 ‘공룡’은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들의 일시적인 속성을 다룬다.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폭포’를 비롯한 다섯 개의 대형 벽화는 파티가 추구하는 ‘사라짐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티는 전시가 개막하기 6주 전 일찌감치 입국해 현장에서 이 벽화들을 그렸다. 벽에 나무판을 고정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 나무판들은 전시가 끝나면 떼어내 불태울 예정이다. 파티는 “나는 사라지는 것들을 좋아한다”며 “미술관 전시를 할 때마다 벽화를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없애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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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파티는 삼성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 고미술 명작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대거 선보인다. 국보를 비롯한 고미술품과 함께 배치된 파티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 ‘백자 태호’ 뒤에는 파티가 그린 9m 폭의 대형 벽화 ‘동굴’이 펼쳐진다. 생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동굴과 조선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던 항아리를 연결해 한 인간과 국가, 인류의 탄생과 성장을 표현했다. 고려시대 유물 ‘금동 용두보당’(국보) 뒤에 벽화 ‘산’을 그려 넣어 산속에서 용이 모습을 드러낸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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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청자 주전자(국보)를 그려 넣은 ‘청자가 있는 초상’ ‘십장생도 10곡병’ 속 복숭아가 등장하는 초상화 ‘복숭아가 있는 초상’ 등도 만날 수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인기 작가를 데려와 지정문화재급 우리 유물들을 주제로 작품을 그리게 한 건 호암미술관·리움미술관이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작품과 벽화뿐 아니라 파티가 직접 연출한 전시장 벽면의 색상, 아치형 통로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전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 하루 두 번씩 호암미술관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전시는 유료, 내년 1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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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성수영/안시욱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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