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기쁨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4-09-03 17:21   수정 2024-09-04 14:26


새벽에 깨자마자 ‘가을이다!’라는 낮은 외침이 입에서 터져 나온다. 온몸으로 체감되는 가을의 기운이 역력하다. 불과 며칠 전 속옷이 땀에 젖은 채 깨어나 망연히 앉아 있던 새벽과는 이마에 닿는 공기가 완연하게 달라진 거다. 여름이 갑자기 끝나버려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폭염과 열대야로 입맛을 잃은 탓에 살이 빠져 허리띠가 헐렁해졌다. 여름 성시를 이루던 해수욕장 시설들은 여름 장사를 마치고 철시한다. 누군가는 팔뚝이 그을린 채 피서지에서 돌아와 바짓단의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며 ‘아, 올여름은 정말 대단했어’라고 중얼거릴 게다. 벌써 도심의 백화점 상품 매대에는 가을 신상품들이 올라와 있다.

해질녘 황혼은 잘 구운 빵 같고

가을은 먼 데서 와서 마음의 쓸쓸한 가장자리에 머문다. 바람이 잔잔한 밤엔 어두운 풀숲에서 여치나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높고 쓸쓸하다. 새벽에 일어날 때 고양이들도 일어나 거실 한쪽에 놓인 제 밥그릇 앞에 얌전히 앉아 건식사료를 기다린다. 아내는 집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다. 늦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잠이 드는 탓이다. 늦게 일어난 오전의 발레교습소에 가기 위해 서둘던 아내가 나가고, 나는 어지럽게 널린 빨랫감을 챙겨 세탁기에 넣고 고양이들이 모래에 묻어놓은 분뇨를 치운다.

고요한 실내에서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를 틀어놓고 칼릴 지브란의 시집을 읽다가 밀쳐 두고 동네 미용실에 들러 여름내 길어진 머리칼을 잘랐다. 집 나온 김에 강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갔다가 돌아온다. 강은 푸르렀고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다.

말똥 냄새가 풍기는 가을 저녁 때 그늘 아래 가만히 엎드리면 쓸쓸한 기분들이 서성이다가 사라진다. 볕 들지 않은 구석의 흰 그늘이 빛날 때 황혼은 잘 구운 빵 같고, 사방에 어둠 내린 뒤 밤하늘에는 낯선 별 몇 점이 떠 올라와 있다. 왜 환절기마다 마음에 쓸쓸함이 이토록 붐비는 걸까?

잃었던 식욕이 돌아오면 옛 동네의 단골 중화반점을 찾아가 동파육을 먹어야지. 화교 일가가 꾸리던 그 중화반점 동파육은 양도 많고 맛도 좋았지. 그 중화반점이 문을 닫고 화교 일가는 대만으로 떠났을지도 몰라.

맨드라미는 빨간 볏을 세우고

퍼뜩 옛날이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년 시절엔 법과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착한 생각을 많이 했지. 세상은 평화로웠고, 나는 남들에게 관대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생업에 열심이고, 누이들은 아직 어리고 작은 일에도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지. 내 주변엔 언제나 벗들이 넘쳤지. 어머니와 아버지, 발랄하던 누이들, 속 깊은 벗들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 나 혼자만 남아 있을까?

어느 해 가을의 일이다. 산간 지방의 한 휴양 시설에 머물렀는데,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무언가 길바닥을 새까맣게 덮고 있는 걸 보았다. 기이한 광경에 놀라 다가가서 보니, 그건 죽은 매미 떼였다. 이슬에 젖은 날개를 파닥이는 매미들, 숨결이 끊겨 꿈쩍도 않는 매미들…. 급작스럽게 차가워진 새벽 기온 탓에 떼죽음을 맞은 매미 떼라니! 그 장엄한 광경을 마주하고 산 것의 운명은 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숙연했었다. 아버지 떠나고 어머니 가신 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어간다. 올가을엔 웃자란 수염을 면도하고 새 옷을 입고 어머니를 모신 납골당이라도 다녀와 볼까. 바빠도 그럴 시간은 있겠지.

새벽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곧 첫얼음도 찾아오겠지. 찬물에 손을 담그면 소름이 돋아 ‘어, 추워’라고 비명을 지를지도 몰라. 쇠기러기 떼 줄지어 나는 북녘 하늘을 보며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질까? 어디선가 낮닭이 울고, 맨드라미가 빨간 볏을 세운 지금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소소한 얘기에도 큰 웃음을 터뜨려 나를 즐겁게 하던 당신의 안부도 모르고 무감한 마음으로 사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벗의 생사조차 모른 채 사는 사이 우리는 나이를 먹고 몇 번이나 이사를 하고 사는 도시도 달라졌다. 그렇게 우리가 돌보지 않은 모든 우정의 끈들은 헐거워진다. 나는 무슨 일로 바빴던 걸까?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밤새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추위가 닥치기 전 내겐 할 일이 있다. 먼저 거실의 가구 위치를 바꾸고, 여벌의 옷과 읽지 않은 채 쌓인 책들은 골라 버려야겠다. 옷장에는 근래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태반이다. 일용할 양식, 신발 한 켤레, 몸을 가릴 옷 몇 벌, 책 몇 권이면 충분할 테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끌어안은 채 살았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나면 사는 게 가벼워질 테다. 따지고 보면 쓰임이 불분명한 물건을 못 버린 건 욕심 탓이다. 나중에 쓸 데가 있겠지라며 쟁여 둔 물건은 끝내 쓸 데를 찾지 못하고 짐만 된다. 적게 소유하고 간소한 방식으로 사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이제라도 욕심을 비우며 그 꿈을 향해 가보자.

가을이 주는 기쁨은 가을의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자의 몫이다. 가을밤엔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전곡이 듣고 싶어질 거다. 과연 음악을 들을 시간은 있을까? 오, 청년이던 시절처럼 밤을 꼬박 새우며 고전음악을 들을 수만 있다면! 음악이 오는 순간의 기쁨을 오롯하게 받아들이며 여름나기에 지친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자. 심신의 에너지가 고갈된 지금 그보다 더 필요한 일은 없겠지. 올가을엔 더 자주 강을 찾고, 오래 소식 끊긴 벗들에게는 연락을 해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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