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렉라자 FDA 승인은 포니차 첫 수출 같은 것

입력 2024-09-04 17:40   수정 2024-09-05 00:22

mRNA(메신저리보핵산) 코로나 백신 개발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커털린 커리코가 공동 수상자 드루 와이스먼을 처음 만난 건 대학 도서관 복사기 옆에서였다. 1997년, 과학 저널을 복사해서 읽을 당시, 복사실의 복사기 한 대는 사실상 그녀의 전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복사기로 한 중년 남성이 열심히 복사를 하고 있었다. 논문 하나를 끝내곤 연이어 또 다른 논문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커리코는 짜증이 났지만, 인사를 나누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몇 마디 오간 뒤 커리코는 온통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mRNA 얘기를 초면부터 늘어놨다. 와이스먼은 백신 연구에 매달리고 있던 면역학자다. 둘은 대화 중 서로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커리코는 mRNA의 치료적 가능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백신에는 관심이 없었다. 와이스먼은 항원을 세포에 전달할 방법을 찾아 모든 가능성을 시험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빠진 것을 알았다. mRNA였다.

인류를 대재앙에서 구해낸 역사적 연구는 그렇게 복사기 한편에서 시작됐다. 커리코의 표현대로 면역을 몰랐던 RNA 학자와 RNA 경험이 없는 면역학자가 자물쇠-열쇠처럼 결합한 순간이다. 노벨상에는 못 미치더라도 국내 제약사에 한 획을 그은 국산 1호 FDA 승인 항암제 렉라자의 개발 과정도 우연의 연속이었다. 과학자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우연한 만남은 그들의 마음속 절박함에 불을 붙여 필연의 업적을 일궈내는 모양이다.

렉라자 주역 조병철 연세대 의대 교수는 2013년 렉라자의 신약물질 개발자인 바이오텍 제노스코의 고종성 대표로부터 메일을 받고 처음으로 만났다.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변이 폐암 치료제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던 고 대표는 관련 논문을 쓴 조 교수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연구실 인력이 몇 명 되지 않았던 조 교수의 당시 여건상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고 대표는 신약의 핵심 아이디어를 얻어갔다.

두 번째는 조 교수가 싱가포르 연수를 마친 2015년 가을이었다. 유한양행 중앙연구소의 부탁으로 강의차 들렀는데, 그곳에서 남수연 연구소장(현 차바이오텍 R&D 총괄사장)으로부터 공동연구 제안을 받는다. 2년 전 고 대표가 제안한 바로 그 신약개발 프로젝트였다. 그사이 고 대표는 네 곳의 국내 대형 제약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다섯 번째 찾아간 유한양행에 기술이전(라이선스 인&아웃)을 성사시켰다. 남 소장은 왜 조 교수를 점찍었을까. 싱가포르 연수 시절 조 교수는 EGFR 표적치료제 관련 연구로 국가과제에 응모해 낙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남 소장이었다.

세 번째는 2016년 얀센의 ‘리브리반트’와의 만남이다. 리브리반트는 이번 FDA 승인에서 렉라자와 병용 투여 짝을 이룬 폐암 치료제다. 얀센은 미국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자 한국의 조 교수팀에 임상 의뢰를 했다. 싱가포르 연수를 떠나기 전 10명이 채 안 됐던 조 교수의 암 연구실이 100명 이상의 연구원을 둔 세계적 임상시험실로 성장했기에 가능했다. 조 교수가 2년간의 싱가포르 연수 기간 중에도 2주에 한 번씩 밤 비행기로 한국을 오가며 연구실을 키운 결실이다.

조 교수가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모두 임상시험을 주도한 것은 유한양행이 얀센에 1조4000억원 렉라자 기술수출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세계 신약 시장의 키워드는 항암제다. 세계 1위 의약품인 머크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지난해 글로벌 매출은 250억달러(약 33조원)로, 국내 의약품 전체 시장(31조원) 규모보다 크다. 그 거대 시장에 한국은 이제 렉라자로 조그마한 점 하나를 찍은 것이다. 글로벌 현대자동차의 시발점이 50년 전 포니자동차 첫 수출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렉라자-리브리반트는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보다 뛰어난 효능으로 독주 체제를 깨뜨릴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국내 환자들의 약값 부담 절감과 건보 재정에도 일조할 것이다. 이런 것이 제약주권이고,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가 주창한 제약보국이다. 조 교수와 함께 렉라자 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고종성 대표는 칼텍 박사 출신으로 평생 신약개발에 투신했다. 남수연 박사와 바통을 이은 임효영 유한양행 임상의학본부장(부사장)은 모두 의사 출신의 신약개발 전문가다.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외에도 의사들이 역량을 발휘할 곳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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