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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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의 짧은 시입니다. 구상 시인은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을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공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축언(祝言)을 자주 건넸는데, 구상 시인이 그 말을 조금 풀어서 시로 쓴 게 이 작품입니다. 처음엔 긴 시였지만 줄이고 줄여서 6행으로 압축했다고 합니다. 이 짧은 시에 시인의 심성과 의지가 그대로 함축돼 있습니다.
올해로 구상 시인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됐군요. 이에 맞춰 생전에 33년간 살았던 서울 한강변 여의도에 ‘구상시인길’이 생겼습니다. 영등포구가 최근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이 길은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을 보며 마음을 씻어낸다)의 뜻을 담은 구상 시인의 여의도시범아파트 서재 ‘관수재(觀水齋)’ 옆 63빌딩에서 제2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는 여의도공원의 마포대교 남단까지 여의동로 1500여m 구간입니다. 영등포구는 2010년부터 매년 ‘구상 한강백일장’도 열고 있지요.
어제(5일) 오후 여의나루역 2번 출구 앞에서 ‘구상시인길’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시인을 기리며 축하 모임을 가졌습니다. 행사 직전까지 쏟아지던 비가 때맞춰 멈춰 “하늘이 돕는다”는 덕담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최호권 영등포구청장은 “구상 시인과 함께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살았는데 가끔 등나무 아래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선하다”며 “곧 여의도에 들어서는 퐁피두미술관 분관과 제2세종문화회관을 잇는 자리에 ‘구상시인길’이 있어 더욱 뜻깊다”고 말했습니다. 최 구청장이 “마침 제 닉네임이 구상 시인의 시 제목인 ‘꽃자리’”라고 말하자 박수가 터졌지요.
이상국 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은 “평생 ‘강의 시인’ ‘평화의 시인’으로 불리면서 구도적인 삶을 산 구상 선생의 문학과 인생이 저 강물과 함께 오래 흐르고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로 시작하는 구상 시인의 시 ‘강·16’ 낭독과 표지석 제막식이 진행됐습니다.
구상 시인의 딸인 소설가 구자명 씨는 “평생을 강 가까이 살면서 삶과 참을 사색했던 시인을 기념하는 길이 한 나라의 수도를 관통하는 강 둘레에 조성되니 그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며 “너나없이 즉물적이고 가시적인 것에 매달리며 ‘스스로 만든 굴레’ 속에 시달리며 괴로운 이 시대에 ‘앉은 자리가 꽃자리’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참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구 씨는 대를 이어 50년이 넘은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살며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성자(聖者)’로 불릴 만큼 존경받으며 ‘꽃자리’처럼 맑게 살다 갔지만 85년에 걸친 생애는 실로 파란만장했지요.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태어난 시인은 어릴 때 원산 인근의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으로 옮겨 거기서 성장했습니다.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종교과에서 공부했고, 광복 후에는 원산에서 문학 활동을 하다 반동으로 몰려 죽을 뻔했습니다. 이른바 ‘응향(凝香) 필화 사건’입니다. 이후 극적으로 탈출해 월남했지요. 그때 사연이 얽힌 시가 ‘여명도(黎明圖)’인데 전문은 이렇습니다.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를 달려// 말굽소리/ 말굽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를 띠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이 시는 1946년 공산당 치하에서 원산문학가동맹으로부터 광복 1주년 기념 시집 <응향>에 작품을 달라는 청탁을 받고 게재한 시 세 편 중 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시집의 표지 장정은 그의 친구이자 예술 동반자인 화가 이중섭이 맡았지요.
시집이 출간되자 북조선 문화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가 내용을 문제 삼고 나섰습니다. “북조선 현실에 대한 반동적 경향을 가졌다”며 사상 검증과 함께 자아비판을 요구했지요. 광복 후 소련군과 공산당의 ‘지상낙원’이 된 북한을 까마귀 나는 불길한 아침에 비유한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카스바(요새)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이라고 했으니 퇴폐주의적이요,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까지 쇄도했지요. 검열원들은 모두 일곱 가지 죄목으로 그를 엮어 단죄하려 들었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그는 자아비판 직전에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그 길로 월남을 결심하고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38선 부근 연천에서 보안서원에게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는 등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끝에 1947년 2월 서울에 도착했지요.
북에서 경험한 정치적 광기와 좌익 평론가들의 극단적 행태에 환멸을 느낀 그는 문학보다 학문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교회의 도움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서 ‘동서 종교사상 비교 연구’를 주제로 공부하려 했으나 중국 사정이 급변하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시집 <응향>의 필화 사건이 남로당 문학가동맹의 기관지에 대서특필됐습니다. 그러자 김동리 등 남한의 민족진영 문단이 적극 반박하며 구상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구상도 <해동공론>에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하게 밝히며 강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공산당이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초기 과정에서 일으킨 문화적 대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비극적 정치 사건 중 공식적으로 표면화된 최초의 사건이었다”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장한 공산주의 독재 이념의 정체와 야만적 방법, 수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회고했지요.
이런 혼란기에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역임한 그는 6·25전쟁 때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누볐습니다. 1956년 발표한 연작 시 ‘초토의 시’는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잘 표현했다는 극찬을 들었지요. 이후 영남일보와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했고 효성여대, 서강대, 서울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하며 구도자적 문학세계를 펼쳤습니다.
대격변의 시기에 남·북·일을 오가며 수많은 시와 산문, 종교적 깨달음의 족적을 남기고 간 그의 삶은 시대의 격랑만큼이나 굴곡졌습니다. 그래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마련된 ‘구상시인길’의 의미도 더욱 크고 유장하게 다가옵니다. 아울러 ‘꽃자리’의 깊고 오묘한 향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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