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생 총각입니다. 결혼 안했고 아이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캐릭터를 만들었느냐고 놀라는 분이 많습니다. 오히려 자녀가 없다는 점 때문에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었죠. 철저하게 객관적인 데이터로 냉정하게 성공 가능성을 따졌습니다.”
토종 애니메이션 제작사 SAMG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훈 대표를 지난 10일 서울 역삼동 집무실에서 만나 유치원, 초등 저학년 여아들이 타깃인 캐릭터 ‘캐치 티니핑’ 이 인기를 끈 비결을 물었다. 그에게 “직접 자녀를 키워본 경험이 묻어난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싱글’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는 “사업가들은 대개 자녀의 취향이 크게 반영된 사업 아이템을 내놓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오로지 캐릭터 지식재산권(IP)의 시장성과 작품성에 기반해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SAMG엔터테인먼트는 올 여름 그야말로 ‘대박’ 이 났다. 이 회사가 2020년 TV용 만화 시리즈 ‘캐치 티니핑’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 <사랑의 하츄핑>이 관객 100만명 기록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다. 이날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사랑의 하츄핑'은 지난달 초 개봉 후 35일만에 관객 94만5000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추석연휴에는 거뜬히 100만명을 돌파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토종 극장용 애니메이션 가운데서는 '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누적 관객수 220만4870명),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2012년·105만1710명) 다음 기록이다.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2013년·93만1953명) 이후 11년 만에 터진 기록이다. ‘사랑의 하츄핑’은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완성도 높은 영화음악과 영상미, 탄탄한 스토리가 인기 비결로 꼽힌다.
김 대표는 K애니메이션 업계에서 '1세대 개척자'로 꼽힌다. 부산의 한 대학 전기공학과 대학생이었지만, 3D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중퇴, 대학 졸업장 없이 이 산업에 뛰어들었다. 2000년 6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삼지애니메이션(현 SAMG엔터테인먼트)을 설립해 현재 300명 넘는 중견 기업으로 일궈냈다. 이 과정에서 미니특공대, 메탈카드봇 등 인기 캐릭터를 개발하기도 했지만, 뜨지 못하고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공은 세대 확장을 거쳐 가족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랑의 하츄핑’은 어른도 공감할 만한 감정인 첫 사랑, 우정,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 등 복합적인 요소들을 영화 스토리에 녹여냈다. 그 결과 어린이를 자녀로 둔 부모 세대 외에도, 2030 싱글 여성 팬들이 ‘하츄핑 굿즈(기념품)’를 많이 사간다고 한다. 김 대표는 “서양 보다는 아시아 정서에 맞는, 내 친구 같은 마법 요정 캐릭터를 만들려 했다”며 “떨리고 설레이는 느낌을 음악과 영상으로 세세하게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아시아 시장 공략도 가속화되고 있다. 사랑의 하츄핑은 오는 15일 중국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TV 시리즈인 캐치 티니핑을 일본 지상파 채널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통해 노출하기로 했다. 중국 일본에서 봉제 완구 판매도 시작한다.
김 대표는 애니메이션 대국 미국 일본과의 경쟁에 대해 “이제 한국도 해볼만 해 졌다”고 말했다. 그는 “드림웍스 디즈니 파라마운트 같은 미국 기업들이 보유한 IP 자산과 한국과의 격차는 100배 그 이상”이라면서도 “제작기술이 좋아지고 있는데다 시장 잠재성도 크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빠른 인공지능(AI) 기술 습득 열의도 애니메이션 산업을 크게 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내가 상상하는 그림들을 AI가 빠르게 그려낼 수 있어 디자이너의 초기 구상단계에서 시간을 크게 줄여주고 있다”며 “한국의 빠른 기술개방성과 수용성은 제작비 절감과 효율 극대화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김 대표는 당장 ‘겨울왕국’ 같은 애니메이션을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만, 국내물이 감성을 잘 그려내고 음악도 잘 만드는 등 표현력이 좋아 잠재력이 크다고 주장했다. 캐치 티니핑은 메인 캐릭터인 하츄핑(사랑)을 비롯해, 행운핑, 바로핑, 꾸래핑, 라라핑 등 감정과 능력, 가치관 등을 표현한 캐릭터가 100개가 넘는다. 아이들과 말이 통하려면 “어떤 핑을 좋아해?”라는 질문을 해야 할 정도다.
그는 “해외 캐릭터를 가져오면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즉각 해주기 어렵다”며 “한국산 애니메이션이라면 영화, 기념품, 학용품, 캐릭터 키즈카페 등 어린이들을 위한 것들을 바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보람은 직원들이 ‘나 티니핑 만드는 회사 다닌다’고 자녀와 지인들에 자랑할 때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회사에 부모가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때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고 했다. 이어 “2022년 12월 기업공개(IPO) 를 거치며 사회적 책임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며 ”포켓몬 아성을 넘는 토종 캐릭터를 만들어 성장하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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