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 입고 기생이랑 선상 파티…'엄근진' 조선 양반사회를 비웃다

입력 2024-09-12 16:48   수정 2024-09-13 02:56


“어, 형이야. 오늘도 좀 부탁해. 지나갈게.”

“아, 한두 번도 아니고…. 통금시간에 자꾸 이러시면 안 되지 말입니다.”

그림(①) 속 18세기 조선 한양(서울) 길거리에서는 이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한양에는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령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순찰하는 군인)에게 들키면 감옥에 갇히거나 곤장을 맞아야 했지요.

그림 속 갓을 쓴 양반은 이런 통행금지 따윈 개의치 않습니다. 털로 만든 방한용 토시,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소년이 들고 있는 모피 풍차(방한용 모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돈깨나 있는 집안이거든요. 양반 옆에 있는 여인을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여유롭습니다. 빨간 옷을 입은 순라군이 짜증 난 표정으로 양반을 질책하는 반면, 양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슬쩍 갓을 내리며 양해를 구하고 있지요.

이 작품은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에 수록된 30개 그림 중 하나인 ‘야금모행’.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된 이 그림을 보다가 혜원 신윤복(1758~?)의 섬세한 표현과 재치에 새삼 감탄이 나왔습니다. 혜원전신첩을 중심으로 신윤복의 삶과 작품 속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신윤복은 누구인가
이런 그림을 그린 신윤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 가지 정도의 유력한 설만 있을 뿐입니다. ‘대대로 도화서(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일해온 화가 집안이었으며, 화가인 신한평(1726~?)의 아들이다. 한때 도화서에서 일했는데 격이 낮고 속된 그림을 그려서 쫓겨났다. 중인, 서얼 등과 어울려 놀며 떠돌아다녔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설에서 시작해 신윤복의 삶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일단 도화서. 도화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아서 하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었습니다. 이곳에 소속된 ‘국가가 공인한 화가 공무원’을 부르는 이름이 화원(畵員)이었습니다. 이런 화원은 나라의 중요한 사람이나 여러 크고 작은 일에 관한 정보를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게 어진(왕의 얼굴)과 왕족, 공신 등의 초상화였고요. 왕실의 제사를 비롯한 각종 공식 행사도 기록했습니다.

당시 화원은 중인 계층에 속했는데, 대부분의 중인 집안은 대대로 정해진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아버지가 역관(외교관)이면 아들도 역관, 아버지가 의관(의사)이면 아들도 의관이 되는 식이었지요. 신윤복의 집안도 대대로 화원 집안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은 치밀하고 예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특급 화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한평이 50대에 접어들 무렵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꼬입니다. 신한평이 그리는 예쁜 그림과 정조의 ‘엄근진’(엄숙·근엄·진지) 문화 취향은 완전히 상극이었거든요.
쫓겨난 아버지, 방황한 아들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은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급격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자유로워졌고, 유교를 기반으로 한 기존의 사회 질서도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질서를 지키고 싶었던 정조는 문화 정책부터 바꿨습니다. 한국사를 배울 때 나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전통문화’와 글을 지키고 세속적인 글을 금지하는 정책이었지요.

정조는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그림과 책 그림은 권장했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은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이 터졌습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가 신한평에게 책 그림(책가도)을 그리게 시켰는데, 그려온 그림의 화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궁중에서 쫓아내 귀양을 보낸 겁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화원 집안에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젊은 신윤복은 납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왕에게 제대로 ‘찍힌’ 만큼 ‘열심히 일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방황하던 신윤복은 화원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양반과 중인들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업 화가이자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말입니다.
유쾌한 그림 속 ‘파티 피플’의 삶
민간에서는 상업 발달과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덕분에 다양한 예술이 꽃피기 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윤복은 돈 많은 양반이나 중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이 의뢰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부분 사회 변화에 잘 적응해 큰돈을 만지게 된 이들이었고, 돈을 펑펑 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돈 많은 ‘파티 피플’ 입니다. 신윤복은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나고, 놀기 좋아하며 천성이 유쾌한 사람이면서도 마음속에는 양반들의 생활에 대한 은근한 비웃음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유청강(②)’은 말하자면 양반들의 ‘선상 파티’ 장면입니다. 양반 집 아들들이 배를 띄워 기생들과 함께 놀고 있군요. 배에는 볕가리개도 있고, 악사도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서는 턱을 괸 선비가 물에 손을 담근 기생을 아주 푹 빠져서 바라봅니다.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남녀의 모습도 볼만합니다. 주목할 만한 건 볕가리개 아래에 있는 갓 쓴 양반. 세조대(허리띠)의 색이 흰색인데, 이는 상을 치르는 중이라는 걸 의미합니다. 즐거운 자리에 빠지기는 싫으니까 일단 뱃놀이에 따라 나오긴 했는데, 남들 보는 눈도 있고 양심에도 찔리니 엉거주춤 친구들 노는 걸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사회풍자와 인류애 사이에서
그렇다고 신윤복이 사람들의 한심한 모습만 그린 건 아닙니다. ‘월하정인(③)’은 달밤에 만나는 연인의 사랑을 그린 그림입니다.

서로의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밤중이지만, 그래도 여성은 한껏 멋을 냈군요. 자주색 깃 저고리, 풍성하게 연출한 남색 치마에 보라색 신이 포인트로 작용합니다. 이런 옷차림은 원래 기생이 주로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유행이 상류층 여인에게까지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패션 리더로서의 주도권이 상류층에서 기생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질서가 격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신윤복의 화업엔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겉으로는 엄숙한 척, 실제론 엉망진창인 양반들의 삶을 통해 유교 사회를 비판했다는 의견도 있고요. 반대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 본연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지금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에 그림의 일부가 나와 있습니다. 올가을, 한 번쯤 직접 보시기를 권합니다.

성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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