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무장정파 헤즈볼라 요원 등이 갖고 있던 무선 호출기 수백 대가 17일(현지시간) 동시에 폭발해 사상자 수천 명이 발생했다. 헤즈볼라가 주문한 호출기에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미리 기폭 장치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신 단말기 공급망에 침투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최초 사례가 나온 만큼 공급망 보안이 안보의 새로운 변수가 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공격에 사용된 무선 호출기는 한국에서 ‘삐삐’로 불리는 통신 기기로, 호출음을 울리거나 단문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쓰인다. 호출기들은 이날 헤즈볼라 지도부로 위장한 문자를 수신하고 수초간 호출음을 울린 후 한꺼번에 폭발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많은 부상자가 바지 주머니가 있는 허벅지, 엉덩이 등을 다치거나 호출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손 또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헤즈볼라가 구시대 장비로 취급받는 호출기를 대량 주문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도청·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 지도자는 지난 2월 이스라엘의 해킹을 우려해 전 대원에게 휴대폰 금지령을 내린 뒤 서신·호출기·유선전화 등 저기술 통신 기기에 의존했다. 전직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인 아비 멜라메드는 “헤즈볼라 지도부는 휴대폰 대신 이런 (저기술) 장치를 사용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혼란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사상 초유의 ‘공급망 공격’이라고 진단했다. 이스라엘이 과거 유·무선전화 등 통신 기기를 이용해 팔레스타인 활동가를 암살한 적이 있지만 공급망 자체를 조작해 대규모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엘리야 마그니에 중동 군사 전문가는 “이스라엘이 호출기에 폭발 장치를 설치하려면 공급망에 접근해야 했을 것”이라며 “이 장치를 판매한 제3자는 이스라엘이 설립한 위장 조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호출기 제조사로 알려진 대만 골드아폴로의 쉬칭광 회장은 해당 모델은 자사가 아니라 BAC라는 헝가리 소재 기업이 만들었으며 중동을 통해 송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타바시 이사오 일본 공공정책조사회 연구센터장은 “공급망 관리가 허술한 단말기를 노린다면 유사한 테러가 이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레바논과 헤즈볼라가 보복을 예고하면서 중동 확전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총리는 이번 공격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면서 “레바논 주권의 심각한 침해이자 이스라엘의 범죄적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헤즈볼라 역시 “이스라엘에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며 “반드시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공격에 앞서 이스라엘은 “북부 주민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포함하도록 전쟁 목표를 갱신했다”며 확전 의지를 내비쳤다. 가자 전쟁 발발 이후 헤즈볼라의 공격을 피해 주민이 떠난 북부 접경 지역까지 안정화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