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작하는 총선 백서 TF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실천의 첫걸음입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규명하고 문제점을 가감 없이 진단해 어떻게 고치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중략) 이번 총선 백서는 국민의힘이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어야 합니다." (윤재옥 당시 국민의힘 당 대표 권한 대행)
국민의힘 제22대 총선 백서 TF 전체회의는 지난 5월 2일 당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힘차게 출범했습니다. 윤재옥 당 대표 권한 대행 등 당 지도부도 첫 회의에 참석해 총선 백서 TF에 힘을 실었습니다.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맛본 만큼, 그 원인을 찾고 반성하는 '총선 백서'에 대한 각오도 남달랐습니다. 윤재옥 권한대행은 "제대로 백서를 만들어 국민의힘 모든 구성원들이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도록 바꾸고 흐트러질 때가 되면 다시 꺼내 당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했고, 배준영 사무총장 직무대행은 "이번 백서는 변명문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내용도 형식적인 것을 벗어나 혁신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백서가 총선이 끝난 뒤 약 5개월이 지난 뒤 사실상 '실종' 상태가 되었습니다. 백서의 행방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최고위원회의에 제출했다고 하고, 누구는 아직 발간까지 단계가 더 남았다고 합니다.
"저는 발행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비상대책위원을 할 때 전당대회가 끝나고 발표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아직 발표가 안 된 점이 제가 봐도 좀 이상하네요. 백서 특위가 빨리 한 번 더 최고위에 발행하겠다,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말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9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백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백서의 '실종 상태'를 충분히 엿보게 합니다. 최근 당내 인사들에게 '총선 백서'에 관해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김 의원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발행이 된 줄 알았는데, 아직 발행이 안 됐냐'는 것이죠.
그러는 사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이후 최저치를 찍었고, 당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습니다. '구원 투수'로 등판했던 한동훈 대표의 지지율마저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0~12일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한 결과,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 긍정 평가율과 국민의힘 지지도는 직전 조사보다 3%포인트 떨어져 각각 20%, 28%를 기록했습니다.
한동훈 대표 역시 최근 들어 각종 차기 대권 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격차를 벌리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100% 무선 ARS 방식으로 차기 대선후보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한 대표 지지율은 20.7%에 그쳤습니다. 이 대표를 꼽은 응답자는 42.4%에 달했습니다. 직전 대비 이 대표 호감도는 1.7%포인트 오르고, 한 대표는 3.5%포인트 하락한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총선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통령과 당이 총선 전에 했던 실수나 잘못을 총선 참패 이후에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지점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백서에는 의대 증원 문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당정 관계 문제에 대한 지적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지금도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현안이기 때문이죠.
총선 백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총선백서 TF에 따르면, 백서는 지난달 14일 특위에서 최종 의결된 후 22일 서범수 사무총장에게 제출됐습니다. 한동훈 대표를 포함해 백서를 열람해야 할 이들은 모두 열람을 마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남은 단계는 최고위원회의에 백서가 보고된 뒤, 공개 방식과 시점 등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서가 최고위 안건으로 오르지 못해 지금까지 발간이 미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동훈 대표는 지난 총선의 책임자 중 한 명이지만, 총선 이후 103일 만에 다시 당의 키를 쥐게 됐습니다. 총선 백서엔 한 대표가 보기에 달갑지 않은 내용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당내 일각에서 '한 대표가 백서 발간을 굉장히 꺼린다더라'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이유로 백서가 발간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모두가 비판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의힘 지도부 관계자에 따르면, 의정갈등 등 급한 현안에 밀리고 밀린 백서 발간이 추석 이후에는 이뤄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추석 연휴도 이제 끝났습니다. 게다가 총선 이후 국정 지지율은 최저치를 기록하고, 당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 번 '실패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가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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