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수준의 철강사를 보유한 우리나라는 전·후방 산업 및 국가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철강산업의 탄소중립에 힘을 쏟고 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철강생산에서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저감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정부의 연구개발비 지원으로 2025년까지 기초 기술개발이 완료될 예정이고, 현재 파일럿 설비를 위한 예산 확보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수소환원제철 기술이 철강산업의 탈탄소를 이끌기 위해 넘어야 할 큰 산은 재생에너지와 그린 수소 생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철강을 생산하는데 사용하는 에너지 중 약 89%는 고로에서 사용하는 석탄과 가스 등에서 발생하며, 나머지 11%를 전력으로 충당하고 있다. 이 전력의 약 70% 역시 고로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회수해 만든 부생 전력이다. 즉 철강생산에 필요한 에너지의 약 96.7%가 화석연료에서 나온다고 해도 무방하다. 철강산업에서 화석연료 기반 공정을 없애고 수소환원제철을 상용화했다고 했을 때 96.7%의 에너지원이 사라지는 셈이다.
철강산업 탄소중립, 수소 및 전력 생산량 증대 시급
수소환원제철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현재 정확한 수요를 추산할 수는 없지만, 한국 철강산업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2050년 수요량 전망치는 가장 효율이 좋은 수소환원 기술과 수소직접연소 기술이 된다는 가정 아래 그린 수소 약 390만 톤, 재생에너지 유래 전력 약 61TWh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수소 생산량인 210만 톤의 2배에 달하며, 지난해 기준 국가 전체 발전량의 약 10%를 철강산업에만 사용해야 탄소중립을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다른 산업 분야의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수소와 전력량까지 고려하면 수소와 전력 생산량 증대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세계 에너지 전망 2022’를 통해 2050년에는 호주가 글로벌 최대 수소 수출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호주 정부 또한 2050년까지 최소 1500만 톤, 최대 3000만 톤의 그린 수소를 판매한다는 야심을 담은 ‘국가 수소 전략 2024’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재생에너지 및 수소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호주 정부는 단순히 그린 수소 수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기업의 적극적 투자를 유치하며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주요 철강사의 거점을 호주로 이전해 산업 생산 역량을 빠르게 키우고자 한다.
그린 수소와 재생에너지에 더해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하면서 외국 기업이 호주에 수소환원제철 설비를 건설하고, 나아가 제철소를 건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와 그린 수소를 매개로 한 글로벌 산업 역량 확보 경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비싼 운송비를 내고 해외 수소를 수입하기보다 차라리 생산 거점을 옮기는 결정을 할 수 있다. 해외 수소 수입에 의존하는 모델이 한국 산업의 대안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또 그린 수소는 운송과 저장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해외 수입에 적합하다고 간주되는 액화 수소의 경우 수입 과정에서 12% 이상이 증발한다. 또 다른 한계점으로는 해외에서 수입한 수소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그대로 노출된 에너지원이라는 점이다.
대체 불가능한 탄소중립 핵심 에너지원인 수소의 자국 내 생산 능력을 대폭 향상시키고 수입 물량 의존성을 줄이는 것은 국가의 에너지 안보 및 제조업의 경쟁력 유지와 관계된 문제로도 지목된다. 마지막으로 해외에서 안정적 수소 조달이 가능한 시점은 이미 글로벌 수소산업 승패가 기울어진 이후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 재생에너지 상황으로 그린 수소 국내 생산 요원
한국에서는 그린 수소를 생산할 수 있을까? 오는 2033년 한국형 수소환원제철 약 250만 톤 생산에 필요한 수소 14만6000톤을 한국에서 생산한다고 가정하면 약 8000GWh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해 생산량 5만GWh로 국가 총발전량에서 불과 8.6% 차지하는 재생에너지 현황을 고려할 때 수소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용량을 대폭 늘려야 하는데, 열악한 송배전망으로 기존에 생산된 재생에너지마저 버려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철강산업의 탄소중립을 위한 수소 생산 관련 문제 모두 재생에너지 발전량 부족과 전력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소 생산에 사용될 전력 외에도 2050년까지 철강 부문에서만 61TWh 넘는 막대한 양의 전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 명확한 재생에너지 확대 로드맵과 송배전망 개선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기업들의 RE100 달성, 탄소중립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가 국가전략 기술로 선정한 유동 환원로 기반의 수소환원제철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단 2가지 수소 기반 철강 생산 방식 중 하나로, 경쟁 기술과 비교할 때 잔존량이 풍부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어 경제성이 높기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기술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유동 환원로 기반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그린 스틸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탄소중립 기술과 설비 수출을 통한 글로벌 탄소중립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펼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미진한 재생에너지와 수소 정책이다. 현 수준의 정책으로는 2033년 상용화에 성공하더라도 유동 환원로에 가스를 주입하는 기술처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 해외 수입 수소를 구해 실증하더라도 수입할 수 있을 때부터 3년은 실증 기간을 거쳐야 한다. 늦어진 만큼 한국의 그린 스틸 초기 시장 공략 기회와 유동 환원로 기반 수소환원제철 기술 수출 기회도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한국에서 탄소중립 수소환원제철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철강사들이 해외로 설비를 이전할 가능성도 있다. 철강산업의 산업 연계 효과를 생각하면 자동차와 조선 등 한국 제조업 전반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일련의 문제가 도미노처럼 발생하기 전에 재생에너지와 그린 수소 생산을 위한 에너지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한 산업의 발전 문제라고 보기에는 너무 중요한 선택의 시점이다. 한국 철강산업이 친환경 경쟁에서 살아남고 국제 철강 기술을 선도할지, 아니면 연관 산업과 함께 재생에너지, 수소가 풍부한 국가로 빠져나가 산업공동화 국가가 될지 기로에 놓여 있다. 다만 선택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선택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담보로 하는 결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명주 기후솔루션 철강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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