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습니다. 늦은 저녁 집 앞은 은은한 꽃향기와 기분 좋은 봄바람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12년간 그랬던 것처럼 그 녀석은 문 앞까지 나와 꼬리를 흔들며 맞아줬습니다. 안고 입 맞추는 의례를 마치고 소파에 앉았습니다. 녀석도 옆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랐습니다. 안아달라고도, 예뻐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끄러미 꽤 긴 시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빛은 슬퍼 보였습니다. 녀석은 아마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뇌병변으로 쓰러지고 병원을 오가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동안 온 식구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깊은 슬픔의 근원을. 인간과 개의 관계를 조금 공부한 후에야 헤어지는 게 이렇게 힘든 이유를 알 듯했습니다.
개는 인간이 최초로 사육한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과 달랐습니다. 인간이 잡아들여 사육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먼저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도태된 회색 늑대 무리가 먹이를 찾아 인간을 찾아왔고 인간은 그들에게 먹이를 줌으로써 수만 년 동행이 시작됐습니다. 그중 인간에게 친화력 있게 다가온 늑대가 개로 진화한 것이지요. 개들이 대부분 선한 눈을 갖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 아닌가 싶습니다. 먹이를 주자 개는 인간을 위해 일했습니다. 사냥도 돕고 농산물도 지키고 쥐도 잡았습니다.
그래서 개는 서양미술사에서 충절과 신뢰의 상징으로 종종 그림에 등장합니다.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갑자기 화려한 그림 한 점이 툭 튀어나옵니다. 1400년대에 그려진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 뛰어난 색감, 생생한 묘사, 온갖 상징으로 가득 찬 이 그림의 하단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결혼에 임하며 서로에게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등장하기 전 암흑의 시대로 불린 중세는 개들에게도 암흑기였습니다. 마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고 광견병을 옮긴다고 몰살되기도 했습니다. 개의 개체수가 줄자 쥐의 수가 급속히 늘었습니다. 그 결과는 흑사병의 확산이었습니다. 개를 버린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복수는 아니었을까.
르네상스 이후 개는 다시 인간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개를 키우는 문화가 확산됐고 18세기 파리에는 오늘날처럼 개 패션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현재 개들은 반려견, 치료견, 탐지견, 안내견, 군견 등으로 인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조들인 회색 늑대가 인간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은 좀 특수한 사정이 있기는 합니다. 여름철만 되면 개들의 슬픈 운명이 최근까지 이어졌으니까요. 그럼에도 화끈한 코리아답게 반려동물은 최근 몇 년 새 급속히 늘어났고 개모차가 유모차 판매를 앞지르는 시장의 폭발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반려동물은 인구의 절반과 함께하는 동행자가 됐습니다.
그 영향으로 개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최근 이슈가 된 것은 반려동물 보유세입니다. 명칭부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가족과 같은 반려동물을 물건 취급하면서 세금까지 내라니. 직관적으로 반발이 나올 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개와 고양이에 세금을 매긴다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물론 찬성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키울 의지와 자격을 증명하고 그 돈이 반려동물 복지를 위해 쓰인다면 흔쾌히 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금에도 신뢰는 중요합니다. 정부가 반려동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세금부터 내라고 하면 저항은 불 보듯 뻔합니다. 반려인들도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합니다. 전국 야산의 들개 얘기를 들으면 먹먹해집니다. 유행처럼 반려동물을 데려와 키우다 마음이 바뀌거나 돈이 들면 내다 버린 결과입니다. 이 상황에서 세금을 매기면 더 많은 유기견이 생길 것이라는 관측은 설득력 있습니다.
반려인구 2000만 시대, 우리는 반려동물과 동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 한번 돌아볼 시간입니다. 개를 먹는 나라에서 벗어나자마자 개를 버리는 나라가 되는 것은 아무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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