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유연하게 대화를 모색하자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아 상황이 악화됐다’는 취지의 주장은 사태의 책임을 북이 아니라 국제사회로 돌리는 듯해 영 불편하다. “북한의 핵 보유는 불법이며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던 자기 말을 손바닥처럼 뒤집은 것이라 당혹스럽다.
북핵을 인정하는 순간 비핵화는 물 건너가고 모든 논의는 군축·통제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이는 한반도 및 세계 평화·안정이라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표를 형해화하고 말 것이다. 당장 북한은 7차 핵실험 감행을 저울질하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일 것이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중동권 국가들도 핵무기 확보에 혈안이 될 것이다.
그로시의 발언이 아니라도 ‘북한 비핵화’를 위한 단일대오는 수시로 위협받고 있다. 러시아는 노골적인 북한 편이다. “이미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푸틴)며 북핵을 기정사실화하더니 엊그제는 외무장관이 “북 비핵화는 종결된 문제”라고 했다. 미국 내 기류도 미묘하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핵심 문구를 당 정강에서 뺐다. 두어 달 전의 일이다. 트럼프 당선 땐 북핵을 용인할 것이란 관측도 만만찮다.
북핵 타협론을 불식하기 위한 외교 대응이 시급하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 핵확산금지조약(NPT)은 설 자리를 잃고 핵무장 도미노는 정해진 수순이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일본과 함께 미국 유럽연합(EU) 등을 설득해 ‘북한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를 재천명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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