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서울역, 60년만에 꽃빛·풀빛으로 물들다

입력 2024-10-03 19:15   수정 2024-10-04 02:11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김병종 작가가 처음 상경한 1960년대 후반의 얘기다.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서울은 거대한 잿빛 덩어리였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모아놓은 옛 서울역 건물만큼은 장엄하고 눈부셨다. 이때 작가는 결심했을까. 언젠가 이곳을 알록달록한 생명의 색으로 채워놓겠노라고.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옛 서울역사 대기실이 생동하는 빛으로 물들었다. 예전 기차역을 리모델링한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고 있는 김병종의 대규모 회고전 ‘김병종: 생명광시곡’에서다. 작가가 고향 남원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린 ‘생명의 노래’ 연작을 중심으로 회화 200여 점이 걸렸다. 전시를 기획한 오세령 큐레이터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작가의 작품세계를 내용과 형식이 자유로운 ‘랩소디’(광시곡)에 비유했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50여 년 화업은 탈중국·비서구를 외치며 ‘우리만의 길’을 모색하는 여정으로 요약된다. 한국 시골 정취를 서양화의 대담한 구도로 풀어낸 작품들이 그렇다. 닥나무로 만든 종이 죽과 고운 흙을 섞어 겹겹이 쌓아 올린 캔버스도 중국의 화선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다.

김병종의 회고전이 ‘K-판타지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주자로 선정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K-판타지아 프로젝트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가를 선별해 여는 기획 전시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내년 옛 서울역사 준공 100주년을 앞두고 문화역서울284를 무대로 기획했다.

작가의 ‘풍죽’ 연작 일곱 점이 생명광시곡의 서막을 장식한다. 사군자 중 대나무를 그린 작품들이 일렬로 배치됐다. 동양의 문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푸른색 계열 채색은 서양화의 기법을 따른다. 왼쪽에서 오른쪽 작품으로 갈수록 여백의 미를 과감히 내려놓은 것도 이례적이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자연과 문명의 충돌을 은유한다”고 평했고, 전시를 찾은 중년 관람객은 “나이 들수록 복잡해지는 인생사와 닮았다”고 했다.

옛 서울역사의 공간을 6개 악장에 빗대 구분한 전시장은 자연의 포근함으로 가득하다. ‘송화분분-십이 세의 자화상’(2004~2017)이 대표적이다. 엎드려 누운 어린아이가 바람에 날리는 소나무 화분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예부터 소나무가 많아 지명도 송동(松洞)인 남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의 자화상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14세 때의 첫 개인전에서 여성 누드화를 내놓아 마을 어른들의 타박을 듣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먹고살기 위해 삽화와 달력 그림을 전전했다. 1980년대에는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바보예수’를 내놨다. 당시 종교계에서 신성모독을 이유로 들고 일어났을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있던 작품이다.

인생의 변곡점은 1989년 찾아왔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이면서다. 병원 생활을 마치고 회복하던 작가는 동토를 밀고 올라오는 새싹을 보며 전율했다고 한다. 생명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그는 고향 남원의 어머니 집 뒤뜰을 찾았다. 이후 기억을 더듬어가며 봄이면 만개하던 남원의 숲을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작가의 개인사를 살펴볼 수 있는 미공개 작품과 소품이 여럿 배치된 점도 전시의 매력이다. 군 복무를 마친 작가가 강사로 일하며 그린 습작, 신인 시절 전국대학미술전람회 대통령상을 안겨준 ‘작업’(1980) 등 초기작을 감상할 흔치 않은 기회다. 작가가 미술평론과 희곡 부문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의 원고 등 문필가로서의 면모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24일까지, 관람료 3000원.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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