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수도는 전 세계 네 곳이 있다.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그리고 프랑스 파리. 매년 2월과 9월, 이른바 이들 ‘빅4’ 도시에서 유명 브랜드들이 각자의 컬렉션을 발표하고, 여기서 한 시즌을 관통하는 트렌드가 탄생한다. 대중적이고 트렌디한 뉴욕 패션위크를 시작으로 신진 디자이너의 요람인 런던 패션위크, 럭셔리 브랜드의 각축장인 밀라노 패션위크가 끝나면 파리 패션위크가 대미를 장식한다. 가장 마지막인 만큼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행사로 꼽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의 위상이 흔들렸다. 국가 간의 이동이 제한되자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파리로 모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1943년, 패션 홍보 담당자로 근무하던 미국의 엘리너 램버트가 ‘프레스 위크(Press Week)’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이 행사가 뉴욕 패션위크의 시발점이 됐다.
뉴욕 패션위크는 대성공을 거뒀다. 자연스럽게 뉴욕의 패션산업도 빠르게 성장했다. 위기감을 느낀 파리의 디자이너들은 행동에 나섰다. 오트쿠튀르 조합이 주축이 돼 1973년 만들어진 게 파리 패션위크다.
파리의 첫 패션위크는 시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베르사유궁 복원 기금을 모으기 위해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5명,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국 디자이너 5명이 컬렉션을 발표하는 쇼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쇼는 후에 ‘베르사유의 전투’라고 이름 붙여지며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패션쇼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올해 파리 패션위크는 9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열렸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디올 등 108개 브랜드의 70개 쇼와 38개의 프레젠테이션이 9일간 이어졌다. 브랜드가 발표한 컬렉션뿐 아니라 장소, 런웨이 무대 연출, 음악 등이 함께 만드는 ‘종합예술’의 향연이었다.
로댕 미술관에서 열린 디올의 2025 봄·여름(SS) 쇼에는 궁수가 등장했다. 고대 여전사를 연상케 하는 복장으로 런웨이에 등장한 아티스트이자 양궁 선수인 사그 나폴리가 활을 쏴 과녁을 맞히며 쇼의 시작을 알렸다. 디올이 이번 시즌에 발표한 스포티한 컬렉션과 일맥상통하는 퍼포먼스였다. 올여름을 달군 파리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파리 디즈니랜드에서 쇼를 연 브랜드도 있다. 파리에 기반을 둔 코페르니다. 코페르니의 쇼에서는 디즈니 캐릭터를 활용한 컬렉션뿐 아니라 미키마우스의 귀를 단 하이힐, 뿔이 달린 신발 등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특이한 디자인의 컬렉션이 줄을 이었다.
루이비통은 루브르 궁전 동편의 정원인 쿠르 카레 안에 쇼장을 만들었다. 건물 외벽에 거울을 붙여 궁전의 고풍스러운 외관이 거울에 비치도록 했다. 쇼장 내부에는 브랜드의 시그니처 제품인 각양각색의 여행용 트렁크를 퍼즐처럼 맞춘 듯한 형태의 런웨이가 설치됐다. 에르메스는 프랑스 국립헌병대 내 승마장을 작업실로 탈바꿈시켰다. 나무틀과 캔버스로 꾸며진 런웨이를 우아하면서도 실용적 원단인 가죽, 데님, 메시 등의 소재로 만든 옷을 입은 모델들이 당당하게 걸었다. 260개의 흑백 줄무늬 원기둥이 도열한 정원으로 잘 알려진 팔레 루아얄에서는 이자벨 마랑의 쇼가 열렸다.
초청장의 패키지 디자인도 브랜드별로 각양각색이다. 스페인 브랜드인 로에베는 이번 2025 SS 시즌 쇼 초청장과 함께 반지를 보내 화제가 됐다. 볼드한 금색 반지에는 브랜드의 이름과 브랜드가 창립된 연도인 ‘LOEWE 1846’을 새겼다. 루이비통은 검은색 에피 가죽(거친 물결무늬가 있는 가죽)으로 만든 파우치에 초청장을 넣었다. 초대장에는 참석자의 이름과 배정된 좌석 번호가 적혀 있었다. 쇼장에 도착해 이런 초청장을 보여줘야만 입장할 수 있다.
쇼장 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쇼 참석자는 물론, 쇼에 참석하는 유명인을 보러 온 팬도 많다. 한국의 연예인들도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 다수 참석했다. 멤버 모두가 서로 다른 브랜드의 앰배서더로 활동하고 있는 걸그룹 블랙핑크가 대표적이다. 리사는 루이비통 쇼에, 같은 그룹의 지수는 디올, 제니는 샤넬, 로제는 생로랑 쇼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리=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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