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누가 뭐래도 ‘밥의 민족’이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격무에 시달릴 때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위안한다. 만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도시락을 싸 들고’ 말린다. 죽도록 잡고 싶은 살인 사건 용의자에게조차 “밥은 먹고 다니냐”(영화 살인의 추억)고 묻지 않나.
식사는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행위다. 호혜성이 기본 바탕이다. 결혼식에 정말 밥만 한 끼 얻어먹으러 가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 출신 심리학자인 그레고리 라즈란은 1938년 실험을 통해 ‘식사의 힘’을 증명하기도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눈 대학생들에게 정치적인 주장을 들려주면서, 한 그룹에만 음식을 줬다고 한다. 실험 결과는 식사를 곁들인 그룹이 정치적 주장을 훨씬 더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나누는 여유로운 대화가 협상에도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는 ‘런천 테크닉’(오찬 기법)이란 심리학 용어도 여기서 나왔다.
정치에서도 식사는 중요한 도구다.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없는 농밀한 대화들이 밥상 앞에서는 자연스레 오간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협상이 비공개 만찬 자리에서 이뤄진 사례도 많다. 1970년대 냉전의 양극단에 있던 미국과 중국 간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의 만찬이 계기가 됐다. 닉슨은 당시 보좌관들의 만류에도 마오쩌둥이 건넨 독한 마오타이를 마셨다고 한다. 반공주의자가 제 손으로 미·중 관계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역사적 순간의 한 장면이다.
반면 요즘 우리 정치권에선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밥 한 끼 하는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탄핵과 특검이란 날 선 구호만 오가는 정치권에서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마련되긴 쉽지 않다. 최근 만난 한 초선 의원도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했다. 간식으로 치킨을 시켜 주변 다른 당 소속 의원실에 나눠 줬는데, 다들 의아하게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는 “다 같이 고생하는 이웃이니 함께 먹자는 것이었는데, 신기한 사람이라는 양 쳐다보더라”며 “초선이라 국회 관행을 몰랐나 싶었다”고 했다.
얼마 전 열린 국회의원 축구대회 후 뒤풀이가 22대 국회 들어 사실상 첫 여야 단체 식사 자리였다. 이날 참석한 한 여당 의원은 “상임위에서 만난 야당 의원은 괴물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술 한잔 하며 얘기를 나눠 보니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상견례지만, 과거엔 수시로 이뤄진 일이 어쩌다 한 번의 이벤트가 됐다는 점은 아쉽다. 한 중진 의원은 “과거에는 본회의장에서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싸웠다가도, 카메라가 꺼지고 나면 다 같이 ‘밥 먹으러 갑시다’라며 함께 나갔다”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던 그때 오히려 여야 협치가 잘 이뤄졌다”고 돌이켰다.
국회를 넘어 요즘 당정 관계에서도 최대 이슈는 식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달 초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를 불러 만찬을 열었다. 독대를 지속적으로 요청한 한동훈 당 대표는 초청받지 못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한 대표와의 자리에선 없었던 맥주잔과 함께 “우리는 하나다”라는 친밀한 건배사도 오갔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하는 연례행사라고 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며칠 뒤 주말 한 대표는 당내 친한계 의원 20여 명을 불러 모아 따로 저녁을 함께했다. 미리 잡아 놓은 행사라는 해명에도 용산에 대한 ‘견제구’라는 해석이 이어졌다. “대동단결해도 부족한 지금 이런 계파 모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권영세 의원)는 비판도 나왔다. 계속되는 파열음 끝에 오는 16일 재·보궐선거 이후 윤 대통령이 한 대표와 독대할 방침을 세웠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누구나 밥상머리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런 상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견을 좁혀 가는 게 정치의 힘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당정 관계, 특검 요구와 거부권이란 도돌이표만 반복되는 국회를 회복하려면 밥 한 끼 할 수 있는 여유부터 되찾아야 한다. 남을 설득하기 위한 ‘런천 테크닉’ 대신 서로 제 편만 챙기며 상대는 배제하는 ‘만찬 테크닉’만 횡행하는 정치권의 모습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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