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가 '분쟁공식' 바꿨다…경영권 공격 사정권 기업만 212곳

입력 2024-10-13 17:48   수정 2024-10-21 16:20

경영권 분쟁 사례는 올해 들어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오랜 동업자 관계에서 갈라선 고려아연 외에 한미사이언스와 같은 가족 간 분쟁, 에프앤가이드·래몽래인 등 최대주주와 기존 경영진의 다툼, KT&G 등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까지 사례는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경영권 승계가 활발해지고 사모펀드(PEF)나 다른 기업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사례가 늘면서 최대주주 등의 지분율이 낮아진 점을 배경으로 꼽고 있다. 여기에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부상도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에서 기업 실적이 예상을 밑돌거나 주주와 경영자 간 경영 방식에 이견이 생기자 경영권 다툼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경영권 취약 기업 급증
13일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 매체 마켓인사이트의 집계에 따르면 시가총액 3000억원 이상 국내 상장사 479곳 중 최대주주 지분율이 33% 미만인 기업은 212곳이다. 통상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이 전체의 3분의 1 미만이면 경영권이 취약하다고 평가된다. 다른 주주들이 규합해 주주총회 특별 결의 사안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 기업 중 최대주주 지분율과 나머지 주요 주주의 합산 지분율(국민연금 제외) 간 격차가 10%포인트 미만일 정도로 작은 곳도 49개에 달한다.

투자은행(IB)업계에선 금호석유화학 한진칼 한솔케미칼 등 전통적인 대기업과 엔씨소프트 크래프톤 넷마블 등 게임사, 한미사이언스 HLB 광동제약 등 바이오 기업을 대표적인 ‘사정권’ 내 기업으로 꼽는다. 가족 간 잠재 갈등이 남아 있는 DB와 DB하이텍, 2대 주주인 쉰들러가 경영권 공세를 펴온 현대엘리베이터도 분쟁 가능성이 있다.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 투자전략부는 “주요 주주 간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고, 밸류에이션 매력이 있으며 풍부한 현금을 보유한 기업들이 분쟁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제2, 제3의 MBK 나오나
글로벌 PEF뿐만 아니라 규모가 급성장한 국내 PEF들도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PEF 시장은 국내에서 1조원 넘는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사가 35곳까지 늘 정도로 급성장했다. 전통적인 비상장사 경영권 인수(바이아웃) 전략에만 집중하기엔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대형 매물도 점점 사라지자 새로운 수익원으로 ‘분쟁’이 떠오르고 있다.

한 대형 PEF 관계자는 “MBK파트너스는 전략 입찰에서 높은 가격에 회사를 매입한 뒤 저금리로 풀린 유동성 덕에 더 비싸게 파는 ‘모멘텀’ 플레이를 가장 잘했는데, 고금리 시기엔 통하지 않아 경영권 분쟁으로 전략을 바꿨다”며 “MBK가 변신에 성공하면 다른 PEF들도 투자자(LP)를 설득하기 한결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지주사들도 ‘비상’
투자업계에서는 경영권 분쟁의 종착지는 결국 주요 대기업의 지주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대부분 지주사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으로 자산 가치 대비 주가가 저평가된 데다 그룹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최우선 타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분쟁 공식도 깨질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경영권 지분율이 30% 이상이면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는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당장 지분이 적더라도 외부 자금을 활용하면 현재 주가에 일정 프리미엄을 얹어 공개매수를 실시하고 나머지 주주들을 포섭해 지분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과거에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소액주주들이 PEF와 손잡고 경영권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에서 2005년 닛폰방송(NBS)을 둘러싼 라이브도어와 후지TV 간 경영권 전쟁이 국민적인 화제가 된 뒤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논의가 본격화된 것처럼 국내에서도 고려아연 분쟁 이후 이 같은 논의가 촉발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차준호/박종관/하지은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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