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끄떡없던 명품(럭셔리) 수요가 최근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전 세계 명품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팬데믹 이후 최악 실적을 기록하면서 충격을 줬다. 루이비통, 디올 등이 포함된 최대 사업부인 패션·가죽 제품 매출이 코로나19 이후 처음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그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명품 가격도 인하 압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소비자가 지갑을 닫으면서 LVMH 매출도 직격탄을 맞았다. 3분기 LVMH의 아시아(일본 제외)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16% 감소했다. 호조세를 보이던 일본에서의 매출 증가세도 줄었다. LVMH의 전년 동기 대비 3분기 일본 매출 상승률은 20%로 지난 2분기(57%) 대비 대폭 감소했다. 저렴한 엔화를 이용한 중국 관광객의 일본 원정 명품 구매 역시 최근 엔화 가치 상승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명품 커피출레이션(capitulation·항복)은 아직 시작도 안됐다”며 LVMH를 포함한 명품 브랜드의 위상 추락이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업계에선 LVMH 그룹 내외부적으로 가격 인하에 대한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일부 명품기업들은 중산층 고객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조용히 가격을 인하하는 분위기다. 앞서 버버리, 생로랑 등이 분기 매출이 급감하자 제품 가격을 조정했다. 버버리는 인기 제품 중 하나인 나이트 백 미디엄 사이즈 가격을 기존 459만원에서 385만원으로 74만원 내렸다. 프랑스 명품업체 케링그룹 내 생로랑도 국내 가격을 3~15%가량 인하했다.
다만 LVMH 임원진들은 당분간은 가격 조정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이번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장 자크 귀오니 최고 재무책임자(CFO)는 “럭셔리 시장 침체가 최근 몇 년간 단행한 가격 인상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배제하고 있다”면서 “2024년에 판매하는 제품은 2019년 제품과 매우 다르다. 가격이 오른 것은 순수한 가격 인상 전략이 아닌 제품이 개선됐기 때문으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당분간은 가격 인상 기조를 유지하면서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그룹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게 LVMH 경영진 입장이다. LVMH는 3년 전 인수한 오프화이트 지분 전량을 지난달 내다 팔았다. LVMH가 갖고 있는 스텔라 맥카트니 일부 지분도 매각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가격 비판은 품질 개선으로 돌파하겠다는 생각이다. LVMH는 2026년 개장을 목표로 루이비통 디올 티파니앤코 등의 브랜드 장인을 육성하는 Maison des Metiers d'Excellence 센터를 파리에서 짓고 있다. 앞서 LVMH의 회장 겸 CEO인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도 한 연설에서 "사람들은 그룹의 성공에 대해 마케팅 성과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 마케팅은 완전히 부차적"이라며 “LVMH의 미래 성공은 고객이 제품 뒤에 숨은 장인정신을 인정하는 데 달려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다만 디올의 ‘원가 8만원 백’ 논란 등 노동 착취 논란이 이어지면서 장인 정신에 대한 강조 정책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먹힐 지에 대해선 그룹 내에서도 회의적인 반응이다.
이 같은 재고가 매장에서 할인 판매되거나 중국 보따리상들에게 흘러가는 등 회색 시장에 싼 값으로 조용히 풀리는 분위기다. 시즌이 끝나고도 재고가 남은 백화점들이 병행수입 업체나 보따리상에게 넘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 대부분 정가의 30~40% 가량인 도매 가격에 물건을 받아올 수 있다. 명품업체들이 직접 도매 판매를 해 물량을 내보내기도 한다.
아직까지 LVMH에선 이같은 도매 판매에 소극적이지만 악성재고가 계속 쌓일 경우 여타 명품 브랜드들처럼 도매 창고를 완전히 열고 보따리상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전망.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LVMH에선 올 초까지도 초과 재고 대부분을 올해 소진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하는 분위기”라며 “대부분 명품 브랜드들이 도매 장사에 나서고 있고 병행수입 업체나 보따리상들이 푸는 물량이 정가 판매에 영향을 주는 수준으로 대거 풀리고 있다. 가격 인하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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