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블라인드로 펼친 상상력…'런더너' 홀린 韓설치미술 대가

입력 2024-10-17 17:17   수정 2024-10-18 07:38



양혜규(53)는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이름이다. 베네치아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 등 미술제를 비롯해 영국 테이트모던과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최고 권위의 미술관에서 숱하게 전시를 연 ‘월드 클래스 작가’다. 서양 매체들이 뽑는 ‘세계 100대 예술가’ 목록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열렬한 사랑에 비해 국내 대중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 양혜규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라서다.

한 가지 화풍과 재료, 주제에 집중하는 보통의 작가와 달리 그의 작품은 주제와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의 작가’처럼 명쾌한 별명이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다루는 주제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한국 전통과 서양 현대 문화의 결합, 일상 속 평범한 것들의 특별함, 정체성의 혼란, 세계 각지의 원시 종교가 가진 신비로운 매력 등 인류학자의 연구 목록을 방불케 한다. 양혜규 특유의 방대한 연구가 더해지면서 작품에는 각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녹아든다. 그의 작품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지금 영국 런던 현대미술관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양혜규의 개인전 ‘윤년(Leap Year)’은 그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조명한 전시다. 작가의 전체적인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일종의 회고전이다. 양혜규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큐레이터 융 마가 전시 구성을 도맡아 미술관 전체를 가득 채웠다 “4년에 한 번인 윤년처럼 특별한 전시이자 양혜규의 작품 세계로 뛰어든다(Leap)는 뜻으로 제목을 정했다”고. 주요 전시작을 중심으로 양혜규가 걸어온 길과 작품들의 의미를 최대한 쉽게 풀었다.
무명 작가에서 세계 미술계 중심에 이르다


양혜규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94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양혜규는 이듬해 독일의 명문 미술학교인 슈테델슐레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시에 참여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무명 작가였기에 변변한 작업실도 없었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폐기 처분해야 했다.

2004년 발표한 작품 ‘창고 피스’는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출세작이다. 포장한 작품을 널빤지 위에 그대로 올려 젊은 작가로서의 삶과 화려한 전시 이면에 있는 미술계의 단면을 보여준 설치 작업이다. 해외의 소장가가 이 작품을 구입하면서 양혜규는 본격적인 성공의 길을 걷게 됐다. 이번 전시에는 이때의 작품을 재현한 작업이 나와 있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포장 안에 있는 작품은 하나씩 차례차례 꺼내져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양혜규는 다양한 주제와 재료에 주목하며 여러 방면으로 작품 세계를 뻗어나갔다. 2006년 외할머니가 살던 인천 집에서 연 국내 첫 전시 ‘사동 30번지’는 집 공간 그 자체를 미술관이자 작품으로 활용한 작업이다. 관람객은 집 안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도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들, 흘러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전시를 20여 년 만에 재현한 설치 작품과 영상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양혜규를 상징하는 작업 중 하나가 된 ‘블라인드 작업’ 연작도 이 무렵 시작됐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재들에 주목해온 작가가 블라인드에서 발견한 건 ‘이중성’.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의 역할을 하면서도 빛과 소리, 냄새가 스며든다는 점이었다.




양혜규는 이런 블라인드를 매달고, 뒤집고, 엮고, 색칠해 한국의 독립운동사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가 겪은 경험 등 여러 복잡한 주제를 표현했다. 심오한 내용을 품고 있으면서도 직관적으로 ‘예쁜’ 그의 다양한 블라인드 작업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앞다퉈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 곳곳에서도 그의 다양한 블라인드 작업을 만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 작곡가 윤이상의 복잡한 삶과 시대상, 견우·직녀 설화 등 다양한 요소를 품고 있는 대규모 설치 작품이다.
원시 종교, 그 미지 속으로
지난 10여 년간 양혜규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무속과 같은 ‘원시 종교’다. 전시장에 나온 ‘소리 나는 조각’ 연작은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 작가는 이처럼 방울을 사용한 작품을 통해 옛사람들이 중요시해온 ‘하늘과 땅의 연결’을 꾸준히 다뤄왔다. 인조 짚을 엮어 한국과 일본, 남미와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민속적 요소를 다룬 ‘중간 유형’, 한지 등 각국의 전통 종이를 접고 오려서 전통 신앙의 요소를 다룬 ‘황홀망’ 연작 등도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저는 원시 종교에서 일종의 힘을 느낍니다. 기성 종교들처럼 체계화되지 않았고 사회 체계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지요. 이런 것들에는 미지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요소를 연구하고 작품에 담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 일은 인류학자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를 작품에 담기 위해 성실히 공부하고 조사한 뒤 정보의 출처와 맥락을 뚜렷하게 밝힌다는 점에서도요.”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내용을 다루기에 양혜규의 작품은 ‘공부할 준비가 된 관객’에게만 그 매력을 온전히 보여준다. 종종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미술평론가 조너선 존스가 지난 8일 게재한 리뷰가 대표적이다. 존스는 이 전시에 별점 1점(5점 만점)을 매기며 이런 혹평을 남겼다. “거대하고, 복잡하며, 감상하는 보람이 없고, 의미와 감동도 없다.”



반면 영국의 미술사가 줄리언 스탈라브라스는 같은 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존스의 평론을 공개 반박했다. 그는 “독자들이 해당 평론 때문에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예술가 중 하나인 양혜규의 작품을 보지 않는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양혜규의 작품은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아름다운 데다 세상에 대한 독특한 비전과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작가 본인의 입장은 어떨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X(옛 트위터)에 이번 전시를 혹평한 가디언 기사를 공유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기사, 브라보!’라고 적었습니다. 어떤 평론을 하든 그건 평론가의 자유잖아요. 비평의 다양성은 예술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비판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 정도는 갖추고 있습니다.” 미술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양혜규다운 답변이었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런던=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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