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급 대작' 순식간에 완판…글로벌 슈퍼리치 사로잡은 파리

입력 2024-10-17 17:36   수정 2024-10-24 16:44


한동안 유럽 미술계의 맹주는 영국이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3위를 다투는 영국의 입지는 굳건했다. 지난 9~13일 열린 프리즈 런던이 화룡점정을 찍는 듯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악조건에도 기대 이상으로 선방하며 ‘미술시장 훈풍’의 신호탄을 날리면서다.

16일(현지시간) 아트바젤 파리가 베일을 벗자 세계 미술계는 “파리가 런던을 턱밑까지 추격했다”고 입 모아 말했다. VIP 개막일인 첫날부터 높게는 100억원대에 이르는 고가 작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프리즈 런던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작품 위주로 소비자를 공략했다면 아트바젤 파리는 굵직한 대작으로 차별화를 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의 미술 수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런던과 파리의 싸움은 예견된 일이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는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이란 번잡한 이름표를 떼고 일찌감치 새출발을 알렸다. 스위스 바젤-홍콩-미국 마이애미로 이어지는 아트바젤의 영향력과 문화도시 파리의 이름값을 업고 글로벌 슈퍼리치를 겨냥하고 나섰다.

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다. 파리시는 2020년부터 5억4100만유로(약 8000억원)를 들여 리모델링한 ‘그랑 팔레’를 이번 행사를 위해 통째로 내줬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엔 지난해보다 27% 늘어난 42개국 195개 갤러리가 참가했다. 국내 화랑은 국제갤러리가 유일했다.

글래드스톤, 마시모데카를로를 비롯한 여러 유명 화랑이 프리즈 런던을 건너뛰고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올해 아트바젤 파리를 선택한 마이어리거의 토마스 리거 공동대표는 “두 개의 아트페어에 연달아 참여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며 “파리가 더욱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했다.

‘큰손’들의 행선지도 파리로 쏠렸다. 두 행사의 태생적인 차이가 이유 중 하나다. 프리즈가 런던의 미술 골목에서 자생한 아트페어라면 아트바젤은 스위스의 컬렉터 몇몇이 작품 정보를 공유한 데서 출발했다. 미국에서 온 한 컬렉터는 “런던이 보장된 맛의 ‘스테이크’라면 파리는 ‘개구리 다리’”라며 “별미를 찾는 부자들이 대체로 파리를 택했다”고 말했다.

이번 아트바젤 파리의 키워드는 ‘초현실주의’였다. 1924년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주창한 <초현실주의 선언> 100주년을 기념한 기획이다. 행사장 한쪽 복도는 초현실주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교과서에 실릴 법한 거장의 대작도 여럿 보였다.

현장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을 찾은 컬렉터로 발 디딜 틈 없었다. 르미노타우르 갤러리에 걸린 프란티셰크 쿠프카의 1935년 회화, 마리 바실리프의 1911년 드로잉 등 두 점은 행사 시작 90분 만에 판매 완료를 알리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박물관에 전시해도 손색없을 대작들이 순식간에 동났다”고 설명했다.

화랑들의 판매 전략도 ‘고급화’에 치중했다. 국제갤러리는 박서보, 하종현 등 작품 가격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작가의 단색화 작품들을 입구에 배치했다. 현대미술을 메인에 건 프리즈 런던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타데우스로팍의 로버트 라우션버그, 갤러리1900-2000의 호안 미로 등도 관람객의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파리에 모인 큰손들은 기꺼이 주머니를 열었다. 화이트큐브가 줄리 머레투의 2014년 회화를 950만달러(약 130억원)에 팔며 첫날부터 100억원대를 넘겼다. 하우저앤드워스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추상화를 350만달러(약 47억7000만원),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을 200만달러(약 27억3000만원)에 팔며 기세를 올렸다.

한국 작가를 찾는 수요도 눈에 띄었다. 국제갤러리는 이우환의 ‘조응’(2022)을 108만달러(약 14억7000만원)에 팔았다. 페로탕갤러리에 걸린 이배의 ‘붓질’ 회화는 12만달러(약 1억6000만원)대에 주인을 만났다.

파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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