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La Forza del Destino(운명의 힘)>에는 세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운명에 맞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둘은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명마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런데 등장인물 모두가 철저한 파국을 맞는 이 작품의 음악이 잔인하게 아름답다.
베르디 오페라는 스토리가 장중하면서도 서정적인 특징을 갖는다. 극의 전개에 맞춰 흐르는 변화무쌍한 관현악은 웅장하지만 난해한 화성은 쓰지 않는다.
일생동안 총 32편의 오페라를 남긴 베르디의 작품은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1기로 칭하는 초기(1839~1850) 오페라는 애국적 내용을 주제로 순수문예 작품에 음악을 입혔다. <나부코>,<맥베스>,<루이자 밀러>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성숙기로 칭하는 제 2기(1851~1871)에 베르디는 가장 많은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대표작으로 1851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에서 초연한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가면무도회>,<아이다>, <돈 카를로>등이 있다.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남긴 제 3기(1881~1893)를 두고 베르디 오페라의 완숙기라고 하는데 <운명의 힘>은 성숙기(제 2기)와 완숙기(제 3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작품으로 베르디 음악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이 오페라의 서곡(Overture)은 작곡가가 작품 전체의 음악을 선 보이는 서곡의 기능을 넘어 레오노라와 돈 알바로, 돈 카를로 등 주인공 각자의 비극적 운명에 부여한 주제선율을 소개한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고유의 화성을 연결한 이 특징은 그의 완숙기 대표 오페라 <오텔로>에서 보다 심화되는데 몇몇 유럽의 음악가들은 이러한 특징이 '베르디가 독일의 동갑내기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의 영향을 받은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는 이탈리아 음악학자들이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특징이 그의 고유한 작곡기법 변화와 발전 과정일뿐임을 주장하는데 <운명의 힘>이 큰 역할을 한다.
<운명의 힘>은 베르디가 이탈리아의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의 대본으로 완성한 4막 오페라다. 186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초연 당시에는 세 주인공이 모두 죽는 결말이었으나 “무대 위에 죽음만 널려있다”고 말한 베르디의 요청으로 대본 수정을 거쳤다.
1869년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좌에서 개정 발표한 '주인공 한명이 죽음보다 잔인한 운명을 맞는 드라마'가 지금의 작품이다.
지난해 공연을 하루 앞두고 취소됐던 대전예술의전당(관장 김덕규) 제작 오페라 <운명의 힘>이 16일 총 2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막을 올렸다. 지휘자 홍석원이 이끈 한경아르떼필이 서곡을 연주하며 오페라를 시작했다.
<운명의 힘> 서곡 도입부의 트롬본이 들려주는 세 번의 장중한 음정 공격에 현악기들이 수레바퀴를 굴려 빠르게 도망가듯 활을 그었다. 도입부의 금관악기군이 제시하는 불길한 세번의 음정반복은 아버지 칼라트라바 후작의 복수에 자신의 인생을 건 돈 카를로의 주제선율이다. 오케스트라는 극 중 돈 카를로가 등장할때마다 이 화성을 들려준다.
스트링이 연주하는 빠른 음악은 비극적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여주인공 레오노라의 주제다. 이 선율은 극중 2막에서 레오노라가 부르는 아리아 ‘성모님저의 죄를 용서하소서(Son giunta madre pietosa vergine)’와 4막의 유명 아리아 ‘평화를 주소서(Pace mio Dio)’에 서주로 등장한다. 이어 차분한 감정과 긴 호흡을 요구하는 돈 알바로의 테마를 클라리넷이 무리 없이 연주한 후 팀파니와 심벌즈가 가세해 힘을 보태며 서곡이 끝이 났다. 홍석원과 70인조 한경아르떼필은 3시간 동안 박진감 넘치는 템포의 사운드를 들려줬다.
스페인의 귀족 칼라트라바 가문의 딸 레오노라가 잉카제국 출신의 알바로와 사랑에 빠져 도주하기로 약속한 날 밤 비극이 시작된다.
막이 오르고 칼라트라바 후작 역의 베이스 김대영과 여주인공 레오노라 역의 소프라노 조선형이 다정한 저녁 인사를 나눈다. 오페라 <운명의 힘>의 첫 대사로 칼라트라바가 레오노라에게 노래하는 가사 “잘 자라 나의 딸아 (Buona Notte mia Figlia)”는 베르디 자신이 일생에서 겪었던 가장 슬픈 사건인 어린 딸 빌지니아의 죽음에 전하는 아버지의 인사다. 작곡가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한 회한을 첫 대사로 시작한 것은 이 오페라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칼라트라바 후작이 퇴장하고 돈 알바로 역의 테너 국윤종이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음악과 함께 등장해 레오노라와 사랑의 이중창 '아 영원히 나의 아름다운 천사여(Ah per sempre o mio bell'angelo)를 부른다. 이 장면에서 알바로의 등장을 알리는 음악은 베르디가 직전작 <가면무도회>에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의 등장씬에서도 사용한 화성적 전개다. 주인공의 등장을 음악으로 알려주는 것은 베르디 오페라에서 주로 쓰이는 음향 효과다.
알바로와 레오노라의 도주를 막기 위해 재등장한 칼라트라바 후작은 알바로가 버린 권총에서 격발된 총알에 맞아 죽는다. 딸을 저주하며 죽어가는 후작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두 주인공이 도망치며 1막이 끝난다.
서곡에서 소개한 비극적 운명을 향해 세번이나 문을 두드리는듯한 돈 카를로의 불길한 음과 함께 시작하는 2막의 배경은 스페인의 커다란 여관(주막)으로 설정됐다. 무대 뒤편에는 근육질의 거인이 등장하는데 이 거인은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다. 연출가가 운명의 힘의 숨은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 거인은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중에도 세 주인공을 위해 면사포를 쓰고 무릎꿇어 신께 자비를 간구하는 모습이다.
거인의 앞으로 30개의 의자에 마을 사람들이 앉아 카를로의 말을 듣는다. 그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를 죽게 한 여동생 레오노라와 알바노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칼라트라바가(家)의 일을 마치 친구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이번 오페라 '운명의 힘'의 연출팀이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는 전문성을 볼 수 있다. 카를로가 무대를 돌아다니며 이야기할때 마을사람들로 분한 합창단이 의자를 돌려가며 시선을 그에게 맞춘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자연스레 그를 쳐다보게 만드는 고급 연출 기술이다.
이어 작품의 감초 역할을 하는 프리치오실라 역의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이 등장해 한 청년의 손금을 봐주며 군대에 가면 승승장구한다는 말과 함께 조국을 위해 입대할 것을 독려한다. 이 장면에서 다시 한번 베르디의 전작인 <가면무도회>가 떠오르는데 가면무도회에도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점쟁이 울리카 역이 동굴에서 손금을 봐주는 장면이 있다.
베르디는 자신의 오페라에 당시 유행했던 파티, 무속신앙 장면을 가미해 노래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성악가들을 배려했다.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군무와 합창으로 찰나의 볼거리를 제공해 주인공이 무대에 다시 등장했을 때 관객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극을 만들었다.
2막 2장과 3장에서 섬세한 무대의 디테일에 압도됐다. 2장의 배경인 수도원 외관 출입구 좌,우에 작은 십자가가 한개씩 달려있었다. 작은 소품이 현실성을 높여 작품의 몰입도를 높였다.
장 수도원 안뜰이 공개될때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의 회전무대가 극적 효과를 높였다. 수도원 벽에 그려진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프레스코 성화와 촛불은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 관객들도 숨죽이고 작품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레오노라가 수도원장의 허락으로 여성임을 숨기고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바닥에 엎드려 신에게 간청하는 가톨릭의 사제서품식이 무대에서 재연됐다.
막에서 레오노라가 죽었다고 믿는 알바로가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부르는 '오 천사들과 함께 있는 그대여 (O tu che in seno agli angeli)'를 부르던 테너 국윤종과 홍석원이 보여준 'Music must go on' 장면은 음악의 본고장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지휘자와 테너 가수의 노련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테너 국윤종은 노래가 끝날때까지 아낌 없이 고음을 쏟아내 현장의 청중들에게 아낌 없는 박수로 환호를 받았다.
3막에서는 뮤지컬을 보는것처럼 관객들의 눈이 즐거운 장면이 계속됐다. 총알과 화약이 터지는 전쟁 장면에서 피어오르는 특수효과와 음향은 전쟁터에 직접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4막. 돈 알바로의 정체를 알게 된 돈 카를로가 5년동안 그를 쫓은 끝에 그가 숨은 수도원을 찾아와 결투를 신청한다. 알바로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카를로와 결투를 피하고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지만 카를로는 알바로를 인디오라 부르며 모욕하고 결국 둘은 칼을 들고 결투한다.
베르디는 귀족들의 특권과 차별에 대한 저항을 작품 속에 담아왔다. 잉카 제국의 후예인 알바로의 가문을 모욕하는 스페인 귀족 가문 칼라트라바가 남자들이 모두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설정과 <오텔로>에서 무어인 장군 오텔로를 시샘하는 악마 이아고의 음모를 밝혀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베르디가 음악을 통해 약자의 편에 선것을 반증한다.
이 장면의 두 남자 성악가의 이중창은 오페라<돈 카를로>에서 카를로와 포자가 부르는 이중창과 자주 비교된다. 전체 오페라의 남성 이중창 곡을 통틀어 가장 연주가 많이 되는 두 곡이 모두 베르디의 작품이다.
오페라 운명의 힘의 마지막 배경은 스페인의 수도원에 숨어 있는 레오노라의 은신처다. 드라마틱 소프라노가 자신의 절망적 운명을 한탄하며 부르는 ‘평화를 주소서(Pace mio Dio)’를 레오노라가 부르며 등장한다. 레오노라 역의 소프라노 조선형은 저주를 뜻하는 'Maledizione'라는 가사와 함께 관현악의 후주가 끝날때까지 고음을 끌어 힘찬 박수를 끌어냈다.
마지막 장면에 다시 등장한 거인 시지프스는 드디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는 어깨 위에 돌이 아닌 우주를 짊어지고 쓰러질듯 서 있다. 돈 알바로와 재회한 레오노라는 오빠가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칼에 찔려 죽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거인 시지프스마저 두 주인공의 절망적인 운명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지휘자 홍석원의 진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데 전날 최종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홍석원은 레오노라가 칼에 찔린 후 알바로의 심장소리를 표현한 팀파니의 연타에 이어 비명소리를 표현하는 피콜로 소리가 대전예술의전당의 오케스트라 피트의 깊이로 인해 객석에 잘 전달되지 않자 악보상에 한명이 연주하는 피콜로를 두명이 연주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두대의 피콜로가 불어내는 예민한 고음은 칼에 찔린 레오노라가 죽는 살해현장을 목격한 알바로와 관객들이 지른 비명처럼 장내를 울렸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오페라 연출가 이회수는 연출노트를 통해 '결과와 상관없이 주어진 삶 속에서 고민하지 말고 오늘을 즐겁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운명을 대하는 자세다'라고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이 연출가는 작품의 주제인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했을 때 끊이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과 인간의 삶이 동일하게 느껴져 무대에 등장시켰다고 썼다.
대전예술의전당은 오페라 <운명의 힘>으로 공연 제작 능력을 증명해내며 명예를 회복했다.
지난해 6억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준비한 공연의 취소로 비난을 받았으나 대전시와 대전예당이 공연을 취소한건 출연자들의 안전 때문이었다.
당시 공연 제작 전문가들은 "언젠가 터질것으로 예견됐던 사고가 하필 대전에서 터졌을 뿐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예술 분야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격 경쟁력만을 심사기준으로 입찰을 진행한 일반용역 적격 심사의 고질적인 문제에서 온 공연 취소 사태였다는 것이다.
올해 대전시와 대전예술의전당은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무대 제작 전문업체와 수의계약을 체결하는 과감한 결정을 했다. 덕분에 대전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역사상 가장 볼거리가 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시지프스가 무대에 등장하는 대전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운명의 힘>은 오는 19일까지 공연된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