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을 강요하는 건 창의성을 죽이는 행동이다. 젊은이들에게 타인과의 경쟁을 부추기지 말고, 가장 개인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격려해라. 모방을 피하고, 성공을 좇지 말라. 결국 독창적인 자만이 진정한 예술가로 남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라트비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77)는 지난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난 그저 가장 나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 뿐 최고가 되려 하거나 최고인 척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크레머는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극찬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1997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젊은 연주자를 양성하기 위해 창단한 악단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크레머. 오는 23일 여수음악제(KBS교향악단 주관)에서 열리는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공연을 위해 한국에 방문한 그를 만났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창단한 지 벌써 27년째가 됐습니다.
“사실 시작할 때만 해도 30년에 달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이끌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악단과 함께 아르보 패르트, 페테리스 바스크스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의 작품을 세계 초연했고, 정형화된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청중에게 신선한 연주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나를 항상 젊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단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힘은 예술가로서 계속 성장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20~21세기 작곡가의 생소한 작품을 앞장서서 발굴하는 이유는 뭔가요.
“나에게 현대음악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작품만큼 중요합니다. 과거 작곡가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재해석하는 일도 뜻깊지만 우리가 태어난 시대의 소리, 이 시대 작곡가의 감정과 영감을 품고 있는 현대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 또한 연주자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예술가가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난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인이 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음악가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 앞에서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겐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만큼이나 현실에서의 불의에 관심을 두고 변화를 촉구하는 일이 중대합니다.”
▷옛 소련 지배하에 있던 라트비아에서의 생활이 영향을 미쳤나요.
“네. 폐쇄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직접 겪었기에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사회 이념과 정권에 대해 영구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전쟁과 인권 탄압 등 비인간적인 악행을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깁니까.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고통받은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오락거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에 깊게 파고들어 영혼을 정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라얀이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극찬한 일을 기억합니까.
“그럼요. 위대한 마에스트로가 건넨 놀랍고도 관대한 표현이었습니다. 어릴 땐 그의 말이 타당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부담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음악에서 ‘최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음악에서 ‘최고’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좋은 음악이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겼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잘나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뛰어넘어 최선의 음악을 들려주는 데 몰두해야 합니다. 난 카라얀의 표현에 감사했지만, 그의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며 살진 않았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이가 든다는 건 내면이 단단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20대와 30대, 40대와 50대의 연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난 지금도 똑같은 연주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림,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창작물을 찾아보며 영감을 얻고 연주자로서 발전하기 위해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연구합니다. 연주는 나의 일상이자 전부입니다.”
▷‘타고난 천재’란 평가에 동의하나요.
“가족이 전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기에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는 걸 부인할 순 없지만,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난 그저 주변에 훌륭한 스승과 동료들이 많았던 ‘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함께 연주해보고 싶은 한국 음악가가 있습니까.
“피아니스트 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는 연주해본 적이 있는데,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 놀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피아니스트 임윤찬과는 아직 만난 적이 없는데, 기회가 된다면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좋은 연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요.
“문화예술계는 완벽주의자가 필요한 시장이 아닙니다. 빠른 성공을 위해 남을 베끼는 걸 피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매달리세요. 연주자에게 남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위치까지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소리 하나뿐입니다.”
▷평생 새긴 좌우명이 있다면요.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음악을 이용하지 말고 음악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라.’ 평생의 스승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가 늘 하던 말씀입니다.”
▷묘비명에 ‘태어났고, 연주했고, 죽은 기돈 크레머’를 새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네. 전 그저 ‘진정한 예술가’로 남길 원합니다. 화려하거나 긴 수식어 따윈 필요 없습니다. 평생 사람들과 감정, 소리를 공유한 연주자이기에 ‘어떤 사람’이 아니라 ‘크레머의 음악’ 그 자체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게 저를 남과 구별하도록 하는 유일한 서명(署名)이 될 테니까요.”
이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정상급 악단과 거듭 협연하면서 120장 이상의 음반 녹음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82년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받았고, 2002년 그래미상과 에코 클래식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유네스코상, 프리미엄 임페리얼상, 그랑프리 뒤 디스크상, 트라이엄프상 등을 휩쓸었다. 2016년엔 영국 BBC 뮤직 매거진이 발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20인’ 명단에서 살아있는 인물로는 가장 높은 순위인 6위에 이름을 올렸다.
크레머는 알프레드 슈니트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등 생경한 20~21세기 현대음악 작곡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알리는 데 앞장선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6년 아르헨티나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작품을 담은 음반 ‘피아졸라 예찬’을 발표해 전 세계에 ‘탱고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다. 저서로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 <루트비히를 찾아서> <유년기의 파편> 등을 출간했다.
크레머는 민감한 정치·사회 현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예술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201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政敵)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위해 자신의 음반 ‘심연으로부터’를 헌정했다. 2013년엔 러시아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기 위한 콘서트 ‘러시아와의 사랑’을 열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엔 푸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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