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韓 떠난 슈퍼리치 80% "상속·증여세 해결하고 다시 돌아올 것"

입력 2024-10-21 18:01   수정 2024-10-29 16:15


현금 1200억원을 보유한 은퇴 자산가 A씨(65)는 올봄부터 싱가포르 이민을 준비 중이다. 2년 전 아들에게 중소기업을 물려주려다가 세금 부담에 포기하고 사모펀드(PEF)에 매각했다. 한국 상속세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A씨는 세금도 싸고 살기도 좋은 싱가포르를 택했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세금을 꼬박꼬박 다 냈는데 평생 힘들게 번 돈을 내가 왜 절반이나 세금으로 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증여세율을 피해 한국을 떠나는 자산가의 ‘탈한국’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 중 상당수가 ‘역이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속·증여세가 없거나 낮은 해외로 이민을 가 자녀에게 재산을 증여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계획을 잡고 있는 사례가 대다수다. 상속·증여 과정의 ‘징벌적 세금’ 제도가 낳은 신풍속이다. 고액 자산가들의 자산 해외 유출과 중산층에 대한 세금 폭탄을 막기 위한 낡은 세제 개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싱가포르 이어 UAE·홍콩행도 증가
21일 한국경제신문이 재외동포청으로부터 입수한 국가별 해외이주신고자 현황(연고·무연고·현지 이주 포함)을 분석한 결과 싱가포르로 이주한 인원은 2013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4년 동안 단 6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7년부터 올해 1월까지 255명으로 42.5배 급증했다. 2017년 12월부터 해외이주신고 대상에 ‘현지이주’를 새롭게 포함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기간 전체 해외이주신고자가 1920명에서 2만3639명으로 12.3배 늘어난 것보다 증가폭이 훨씬 크다.

싱가포르가 국내 자산가들의 ‘제2의 나라’로 급부상한 것은 상속·증여·배당소득세 등 소위 ‘3대 세금’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하는 자산가들이 싱가포르를 주목하는 이유다. 한국에 사업 근거를 두고 오갈 수 있는 것도 이점이다.

로펌업계에 따르면 싱가포르행을 택하는 이들은 보통 1000억원대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초고액 자산가나 코인 투자로 큰돈을 번 신흥 부자들로 알려졌다. 현지에 패밀리오피스를 차리고 금융 전문가들을 직접 고용해 안정적으로 재산을 불리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한 상속 전문 변호사는 “싱가포르는 패밀리오피스 설립 요건이 까다롭지 않은 데다 치안과 국제적인 교육 환경도 우수해 인기가 높다”고 귀띔했다.

최근에는 세제 혜택이 풍부한 홍콩과 아랍에미리트(UAE)를 택하는 자산가도 늘고 있다. 특히 UAE는 상속·증여세를 비롯해 양도소득세가 없고 법인세도 싱가포르(17%)보다 낮은 9% 수준이다. 실제로 홍콩으로 옮겨 간 이주 신고자는 2013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단 2명에서 2017년 이후 올해 1월까지 242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UAE도 같은 기간 0명에서 27명으로 늘었다.
“자산가 10명 중 8명은 돌아온다”
해외 국적을 취득한 자산가 중 상당수가 ‘역이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특이점이다. 부동산 개발업자 김모씨(57)는 1000억원대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미국 이민을 계획 중이다. 10년 후 한국 귀국이 목표다. 그는 “상속세율이 30%만 됐어도 이민 가지 않고 국내에서 세금을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역이민 심사가 까다롭지 않은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은 단기간에 역이민을 온 경우 세금 회피 목적으로 보고 추징하고 있다. 금액이 많을수록 장기간 머물러야 하지만 최소 5년 이상, 10년이면 충분하다는 게 이민컨설팅업계의 중론이다.

김상훈 법무법인 트리니티 대표변호사는 “싱가포르에 법인을 세울 정도의 초고액 자산가를 제외하면 미국 등 해외 이민을 준비하는 자산가 10명 중 7~8명은 몇 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한다”며 “거액 자산가의 돈이 금융, 부동산에 재투자되며 경제에 돈을 돌게 하는 효과가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산가들의 엑소더스를 막기 위한 상속세제 개편 등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경진/허란/민지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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