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계약 아닙니다…약속한 대로 하셔야죠" [김용우의 각개전투]

입력 2024-10-22 07:00   수정 2024-10-22 10:06

한경 로앤비즈가 선보이는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건설업계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으로 위기다. 대출(법률상 소비대차계약)은 차주인 채무자의 신용을 토대로 이뤄지나 PF 대출은 사업의 수익성을 보고 결정된다. 대출이 승인되려면 대주, 즉 채권자가 보더라도 '돈 되는 사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대주는 일정한 신용등급 이상을 충족한 시공사 명의의 책임준공확약서까지 요구하고, 책임준공확약서가 제출되지 않으면 대출을 승인하지 않는다.

코로나19 이후 연방준비제도(Fed)의 양적완화 및 제로금리 정책으로 전 세계에 막대한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자고 일어나면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현상이 일어났다. 부동산 경기가 최정점을 찍을 2021년까지 금융권에선 수많은 PF 대출이 승인됐고 그 과정에서 시공사 법인 인감이 찍힌 수많은 책임준공확약서가 금융권에 제출됐다. 물론 시공사 또한 나름 계산기를 두드려 돈이 된다고 판단했을 거다. 이렇게 책임준공확약을 한 시공사는 부동산 개발사업에 직접 뛰어들며 사업리스크를 짊어지게 된 셈이다.
'노예계약'이라 불리는 책임준공확약
시공사가 제출한 책임준공확약서는 어떻게 기재돼 있을까. 대부분 아래와 같은 취지로 적혀 있다(비교적 짧은 버전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본 확약서에서 '책임준공의무'라 함은 시공사가 천재지변, 내란,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행사 및 시공사의 부도 사유 발생, 공사비의 미지급 또는 지급 지연, 본 사업 관련 분양률 저조, 민원, 설계변경, 본 사업 부지 확보 여부, 명도 지연, 본 사업 관련 인허가의 미취득, 취득 후 상실·무효·취소·효력의 정지, 대출 및 사업약정서에 따른 기한의 이익 상실 여부 등을 포함한 어떠한 이유로도 공사를 중단할 수 없고, 건축물을 준공하여 관계 법령에 따른 정식 사용승인(조건부, 임시사용승인은 제외)을 대출약정서에 따른 대출금의 최초 인출일로부터 OO개월 이내에 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업계에서 '노예계약'이라고까지 불리는 책임준공확약에 따르면 시공사는 천재지변, 내란,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경우에도 약속된 기한 내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 이처럼 굴지의 1군 시공사들이 약속된 기간 안에 공사를 책임지겠다고 확약해야 대주가 안심하고 대출을 실행한다. 약속된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시공사는 PF 대출채무를 조건 없이 모두 인수해야 한다. 즉 약속한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사유가 발생하는 순간, 보다 정확하게는 대주가 기한이익 상실(EOD·Event of Default)을 통지하는 순간, 시공사는 두둑한 시공이익을 챙기기는커녕 엄청난 규모의 우발채무를 인수하고 이로 인해 회사 가치가 곤두박질 쳐 주주들에게 엄청난 원성을 들어야 할 노릇이다.

공사도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고, 상황에 따라 늦어질 수 있기에 조금 늦어지더라도 대주와 시공사가 서로 좋게 좋게 해결하는 것이 업계의 관례였다. 대주 입장에서도 EOD를 선언하게 되면 예상 손실액을 (연결)재무제표에 반영하고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는 등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주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그간 준공기한을 너그럽게 연장해 줬다. 심지어 도저히 살아날 기미가 없지만 EOD 선언을 하지 않고 기한을 계속 연장해 주면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길 기다리는 사업장까지 있어서 당국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불가항력' 깐깐하게 보는 법원…시공사 준공기한 준수에 혼신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A 사업장 사례를 보자. 대구에서 아파트와 근린생활시설을 건설하는 PF 사업장에서의 책임준공시한은 올해 1월 22일이었고, 시공사는 약 2개월을 조금 지난 3월 29일 공사를 완료했다. 2개월이면 대주가 좋게 넘어갈 수도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대주는 시공사에 책임준공확약서에 적힌 그대로 대출금 전액인 약 800억원의 채무를 갚으라고 얄짤없이 요구했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라는 법 원칙에 따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달라진 대주의 태도에 시공사는 '독박 씌우기'라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고작 두 달 완공이 늦었다고 PF 대출금 전부를 책임지라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거다. 결국 도저히 PF 대출금을 책임지지 못하겠다며 21개의 대주단을 상대로 가처분을 신청했다. 하필 착공 무렵에 광주 빌딩 붕괴 사고가 터졌고, 철거 행정 지도가 깐깐해져 착공이 71일 지연됐다. 착공 이후에도 코로나19 확산, 화물연대 총파업, 레미콘 8·5제 도입 및 토요 휴무제 시행 등으로 인한 콘크리트 타설 지연 등 각종 사유로 약 78일의 공기 지연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사유는 모두 책임준공확약서에 규정된 '불가항력의 사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시공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책임준공확약서에 기재된 대로 그대로 책임을 지라는 거다. 대출 약정을 체결할 당시는 이미 코로나19가 발생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 각종 절차가 지연될 수 있음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봤다. 전면적인 봉쇄 조치까진 취해지지 않았던 데다 광주 빌딩 붕괴 사태로 인한 행정지도 강화는 각종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레미콘 8·5제 도입 및 토요 휴무제 시행이나 레미콘 등 자재의 수급·관리는 원칙적으로 시공사의 책임 영역 안에 있는 사항이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화물연대 총파업 이후 적극적으로 대체 업체를 물색하는 등의 방법을 했을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시공사가 주장한 사유들은 책임준공확약서에 적힌 불가항력의 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4카합20757 결정). 해당 사건은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항고심을 진행하고 있어 결론에 귀추가 주목된다.

건설업계는 달라진 금융권의 태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 약속한 준공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대의 빚을 떠안을 수도 있어서다. 책임준공확약을 한 시공사들은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준공기한 맞추기에 혼신을 다해야 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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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ㅣ
PF사업, 정비사업, 건설하도급 등 부동산 분쟁 전문가다.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수료했다. 투자자산운용사와 국가공인 원가분석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고 하도급법과 건설산업기본법을 연구해 업계 최초로 전자책을 출간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전문건설공제조합, 코트라(KOTRA) 및 각종 건설사와 학회에서 강의했다. 미국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가졌으며, 베트남 현지에 진출한 건설사에 파견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를 토대로 해외부동산투자 관련 분쟁에도 관여하고 있다. 2024년 대한변협 우수변호사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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