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업용 전기요금을 평균 9.7% 인상하기로 했다. 작년 11월 산업용 전기요금을 4.9% 올린 지 채 1년도 안 된 시점에 추가로 인상하는 것이다. 서민경제 부담 등을 이유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정용·일반용 전기요금은 동결한다. 높은 법인세율과 과도한 규제에 더해 지난 4년간 70% 넘게 오른 전기료가 국내 기업의 ‘탈(脫)한국’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전력은 24일부터 산업용 전기요금을 평균 9.7% 올린다고 23일 발표했다. 기업 규모에 따라 차등 인상한다. 대기업은 ㎾h당 평균 181.5원으로 10.2%(16.9원), 중소기업은 177.4원으로 5.2%(약 8.5원) 올린다. 한전은 “2021년부터 누적된 41조원의 적자(연결 기준)를 보전하기 위한 조치”라며 “부담 대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인상했다”고 설명했다. 기업 고객은 한전 전체 고객의 1.7%(약 44만 개) 수준이다. 이 중 대기업은 전체의 0.1%에 불과하지만 전력 사용량은 48.1%를 차지한다.
기업들은 반발했다. 경기 둔화와 ‘3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 중국의 저가 공세로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전기요금 인상까지 떠안아서다. 반도체 철강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전기 사용량이 많은 국가 기간산업이 상대적으로 더 큰 부담을 안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력 사용 상위 20개 기업의 연간 전기료는 지난해 12조4530억원에서 13조8796억원으로 1조4266억원 늘어난다. 지난해 2조5102억원의 적자를 본 LG디스플레이는 연간 전기료를 934억원가량 더 내야 한다. 현대제철도 연 1166억원의 전기료를 더 납부한다. 한전은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을 통해 연 4조5000억~5조원 정도를 더 걷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보다 높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평균 요금은 ㎾h당 179.5원으로, 지난해 기준 미국 전역의 평균 전기료(112원)보다 60.3% 비싸다. 한국 기업이 여럿 진출한 텍사스주(77.6원)와 조지아주(83.4원)에 비하면 두 배 이상이다.
'기업 엑소더스' 부추기는 산업용 전기료 인상…정유·디스플레이 '치명타'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다. 2021년 이후 63.3% 상승한 산업용 전기료가 24일부터 또다시 평균 10.2%(대기업 기준) 오르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전기료는 연 1166억원에 달한다. 올 상반기 영업이익(1538억원)의 75.8%에 해당하는 돈을 전기료로 뿌려야 한다는 얘기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현대제철이 미국에 전기로 공장 건설을 검토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국내 전기값의 급격한 인상”이라며 “미국의 높은 인건비를 감안해도 미국에서 사업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수년째 적자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디스플레이 기업들은 전기료 인상에 한숨을 짓고 있다. 올해 1862억원 영업적자가 예상되는 LG디스플레이는 앞으로 연간 전기료를 934억원(지난해 8075억원→9009억원) 더 내야 한다.
정제마진 하락으로 3분기 적자가 예상되는 SK에너지와 에쓰오일도 마찬가지다. 국내 전력 사용량 8위와 9위인 이들 기업의 전기료는 약 500억원씩 늘어난다. 그렇다고 제품 가격을 올릴 수도 없다. 중국 기업들의 저가 물량공세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용 전기료를 동결한 건 포퓰리즘이란 비판이 나온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2020년 12월 기준 대형 제조업체의 산업용 전기료(300㎾ 이상)는 ㎾h당 94.3원이었다. 이후 여덟 차례나 산업용 전기료가 올라 4년간 70% 이상 뛰었다. 같은 기간 가정용 전기는 35.9% 오르는 데 그쳤다. ㎾h당 전기요금 역시 가정용이 149.8원으로 대기업(181.5원)보다 낮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 학장은 “산업용 전기는 이미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공급되고 있다”며 “원가 대비 60% 수준에 공급되는 가정용을 올리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를 수십 곳 유치한 일본, 인도, 대만과 제자리걸음인 한국의 결정적 차이는 전기료와 송배전망 경쟁력”이라며 “송배전망까지 지어야 하는 가운데 전기료가 인상되면 글로벌 기업의 외면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이전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1년부터 미국을 앞질렀다. 낮은 전기료는 직접 보조금과 함께 미국이 해외 기업을 유치할 때 쓰는 핵심 카드가 됐다. 전기료가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인이 되자 유럽도 전기료 인하에 나섰다. 독일이 대표적이다. 치솟는 전기료(㎾h 370.3원)에 제조업체들이 떠나자 독일 정부는 지난해 11월 전기료에 부과되는 세금을 97% 감면해주기로 했다.
김우섭/이슬기/김형규/성상훈/오현우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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