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뚜기는 10월 말 신제품 가정간편식(HMR) ‘사천마파두부’와 ‘스페셜 중화볶음밥’을 내놓고 본격적인 판매에 돌입했다. 언뜻 보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HMR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출시 과정을 들여다보면 확연히 다르다. 경쟁사들의 제품과 차별화를 위해 줄 서서 먹는 ‘유명 레스토랑’의 레시피를 직접 받아 제품에 적용한 것이다. 일명 ‘레스토랑 간편식(RMR)’이라고 불린다.
오뚜기에 따르면 두 제품은 제주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중식당 중 한 곳인 로이앤메이와 협업해 만들었다. 로이엔메이는 중국 가정식 메뉴를 한상차림으로 선보이고 있는 식당인데 예약이 어려울 만큼 인기가 높다. 오뚜기 관계자는 “로이앤메이의 메뉴를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도 맛볼 수 있도록 상품 형태로 출시하게 됐다”며 “식당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몇 달씩 협업한 끝에 탄생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넷플릭스의 요리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인기가 유통업계의 트렌드까지 바꿔놓고 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미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유통업계도 여기에 발맞춰 RMR 출시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HMR의 일종인 RMR은 유명 식당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제품을 뜻한다. 포장을 개봉한 뒤 전자레인지 등을 통해 조리하면 돼 인기 맛집의 메뉴를 집에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내부 직원들이 전국을 돌며 유명 레스토랑을 발굴해 신제품을 기획을 제안하는 등 RMR가 업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떠올랐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이들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주요 식품기업들의 경우 하루가 멀다 할 정도로 다양한 RMR 신제품을 최근 들어 쏟아내고 있다.
오뚜기만 보더라도 최근 매달 RMR을 출시할 정도로 이 카테고리에 집중하고 있다. 앞서 지난 9월에는 미역국 전문점 ‘청담미역’과 손잡고 이 식당의 인기 메뉴인 ‘소갈비미역국’ 시판에 들어갔다. 청담미역은 서울 강남 지역에서 시작된 미역국 전문 프랜차이즈다. 깊고 진한 국물 맛으로 유명한데, 이를 눈여겨본 오뚜기가 협업을 제한하면서 함께 RMR까지 제작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RMR에 열을 올리는 건 식품업계뿐만이 아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이색 PB(자체 브랜드)’를 무기로 충성고객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오프라인 유통채널도 맛집들을 돌아다니며 신제품을 기획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 결과 CU는 삼성역에 위치한 해장국 맛집 중앙해장과 협업한 RMR 6종을 개발했으며 세븐일레븐은 겨울철을 앞두고 대표 간식인 호빵을 갈비 전문점 ‘청기와타운’의 맛을 입혀 출시했다. 이 외에도 GS25를 비롯해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이 다양한 RMR을 앞세워 급증하는 소비자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이를 바꾼 건 코로나19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서 유명 식당들도 매출이 급감하며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결국 이들은 생존을 위해 유통·식품기업과 손잡고 RMR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고, 유명 식당의 이름을 건 다양한 제품들이 시장에 등장했다.
소비자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맛집 레시피를 적용한 RMR를 찾는 이들은 예상보다 많았다. 식당에 직접 방문하기 어려워진 소비자들이 외식을 대체하기 위해 RMR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제품들은 출시와 동시에 품절이 될 만큼 대박이 나기도 했다. 게다가 유통·식품기업들은 맛집의 인지도를 활용해 다양한 마케팅을 펼치며 큰 홍보 효과까지 얻자 점차 RMR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통·식품기업들은 더 많은 RMR을 내놓았으나 큰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너무 많은 제품이 나오다 보니 소비자 선택지가 다양해지면서 ‘대박’을 치기가 어려워졌다. 여기에 엔데믹까지 시작되면서 다시 사람들이 식당을 자유롭게 찾게 됐고 뜨거웠던 RMR 열기도 빠르게 식었다. 기업들의 RMR 출시 소식도 뜸해졌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시장에 다시 불을 지핀 건 ‘흑백요리사’다. 프로그램이 큰 흥행을 하면서 ‘열풍’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한국에서 미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요리사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입장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문전성시다. 낙수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맛집 탐방’이 다시 유행하면서 블로그나 SNS에 자주 소개되는 식당들도 연일 손님들이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예약제로만 손님을 받는 식당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매달 정해진 날에만 예약받는데 유명 식당은 예약 오픈과 동시에 마감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런 트렌드가 나타나면서 유통·식품기업들이 다시 RMR에 주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주로 줄을 서도 들어가기 어려운 식당들과 접촉해 함께 협업을 제안하고 있다”며 “일반적으로 해당 식당의 레시피를 받아 이를 상품화한다. 이 과정에서 시제품을 식당 셰프들에게 맛보게 하는데 이들이 만족할 때까지 맛을 수정 및 보완한 뒤 시장에 내놓는다”고 했다.
식당의 간판을 걸고 제품이 판매되기 때문에 맛이 없을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일반 HMR보다 더 깐깐한 과정을 거쳐 소비자에게 전달된다는 설명이다.
특히 최근에는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이들이 명성을 얻으면서 각각의 셰프들과 계약을 맺고 RMR을 개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예컨대 GS프레쉬는 ‘흑백요리사’에서 ‘요리하는 돌아이’로 주목받은 윤남노 셰프와 계약을 맺고 그가 개발한 소스를 입힌 냉장 소고기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RMR 열풍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미식에 대한 수요 급증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는 ‘고물가’가 RMR 인기를 이끌 것이라는 분석이다.
원재료값 상승으로 외식 물가가 고공 행진하고 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직접 가서 먹는 것과는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유명 식당의 맛을 상대적으로 싼값에 즐길 수 있는 RMR을 찾는 소비자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식당 입장에선 RMR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브랜드의 희소성이 떨어질 수 있으며 RMR 맛이 소비자 눈높이에 미치지 못할 경우 맛집 명성에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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