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의 머릿속을 맴돌던 음악은 지금과 달리 미국의 포크 음악과 영국의 포크·록 음악 등이 주류였다. 밥 딜런, 존 바에즈부터 시작해 미국의 피트 시거, 알로 거스리, 닐 영, 데이비드 크로스비, 필 옥스, 팀 하딘, 팀 버클리 등등 당장 떠오르는 뮤지션만 수십 명이다.
평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과 아일랜드의 바람이 불어오는 공간을 상상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뉴포트의 벨에포크(아름다운 시절)도 가슴 속에 그렸다. 그런 노래 덕에 남루한 청춘을 버틸 수 있었던 듯하다.
얼마 전 국군의날에 불현듯 그때 노트에 적은 음반들을 레코드(LP)로 듣고 싶어졌다. 생각난 곳은 오랫동안 잊고 지낸 LP 가게. 그곳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예전에 ‘LP 과소비’를 할까 무서워 뇌에서 일부러 기억을 지운 탓이 아닐까 싶다.
냉면으로 이른 저녁을 해치운 뒤 LP 가게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너무 많은 LP가 눈에 익었다. 많이 잊힌 듯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커버 아트워크에서 일부는 곡명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생각이 나는 곡이 있었다.
이런 음반을 발견하면 하염없이 무너져버린다. 평소 나름 절제력이 좋다고 생각해도 별수 없다. 주섬주섬 뽑아 든 LP가 모아보니 꽤 무겁다. 주인장이 커피를 탁자 위에 놓고 간 모양이다. 너무 과몰입한 나머지 지칠법한 때가 돼서야 커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꿀꺽꿀꺽 마셨다. 조금 더 힘을 내 전체를 둘러보고 LP를 계산대로 가져갔다.
눈이 빨갛게 LP에만 정신이 팔렸다가 어느 순간 오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간만에 보는 명기다. ‘JBL K2 S5500’. 우선 중앙을 가로지르는 혼 타입 개구부가 입을 쫘~악 벌리고 있다. 컴프레션 드라이버로 소리를 내는 유닛으로 좁은 개구부를 통해 소리를 멀리 보낼 수 있으며 그만큼 직진성이 높아 시원시원하다.
여러 생각에 빠져 음악을 좀 더 들었다. 주인장이 틀고 있는 음악이 궁금해서다. 여기서 정신을 놓고 방금 입고된 LP 몇 장을 주섬주섬 추가로 구입했다. 어떤 것은 과거에 국내 라이선스로 발매된 음반이었고 당시 CD 혹은 카세트테이프로 들은 음반이다.
어떤 음반은 제대한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가지고 호기롭게 단골 레코드숍에 가서 수입의 반으로 구매한 앨범이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던 시절이다. 아날로그 시절과 디지털 시대가 혼재했던 10대와 20대, 그 언저리의 추억까지 모두 소환하는 음악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음악은 음반에 담겨 하드웨어를 통해 다가왔고 그것은 다시 사람과 시간으로 연결됐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지금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닐봉지 한 개는 채울 정도의 중고 LP는 일시불로 구입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한 가지 상념. 아마도 20대의 결핍이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열정에 불을 더 활활 지폈는지도 모른다. 너무 여유롭게 살아서 음반 따위는 너무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면 혹은 군대에서 모진 훈련과 근무를 버티며 음악을 상상만 하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결핍은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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