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무시한 '환경규제'…소비자·자영업자 울렸다

입력 2024-10-25 18:01   수정 2024-11-04 19:06

문재인 정부 당시 도입한 일회용품 보증금제, 플라스틱 빨대·종이컵 사용 금지 등의 환경규제가 줄줄이 백지화되거나 연기되고 있다. 현실과 맞지 않는 ‘탁상 환경규제’를 섣부르게 시행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와 자영업자의 불편이 발생하자 정책을 번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환경부는 도입을 앞뒀거나 시행 중인 각종 환경규제의 실효성, 부작용 등과 관련해 심층 조사에 나설 예정이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당초 취지와 다르게 소비자 불편과 자영업자 피해를 초래하는 규제가 많다는 비판 여론을 수용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도입이 예정된 환경규제를 효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보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김완섭 환경부 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일회용 컵 보증금제 의무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이 제도를 지방자치단체 자율에 맡겨 시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22년 말부터 제주와 세종에서 일회용 컵 보증제를 시범 운영한 결과 컵 반환 및 회수 등과 관련해 소비자와 자영업자들이 큰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지난해 11월부터 본격 단속하기로 한 카페의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컵 금지 규제도 시행 직전 적용을 무기한 유예했다. 환경부는 택배 과대포장 규제도 실효성 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제도 개선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는 2022년 4월 포장재의 포장 횟수를 1회로 제한하는 내용의 택배 포장 관련 규제를 신설했지만 시행을 계속 미루고 있다.
뒤집힌 종이컵 금지·보증금제…'탁상 규제' 국민 불신만 키웠다
환경보호라는 명분에만 매몰…합리적 규제·자율로 방향 전환
소비자와 유통업계는 작은 제품 하나까지 큰 상자에 넣는 과대포장을 줄여야 한다는 규제 취지엔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규제가 실효성 있게 적용될지에 대해선 의구심을 품고 있다. 현재 포장 규제 대상 업체는 130만 곳이 넘는다. 관련 제품 종류도 1000만 개 이상이다. 포장 규모와 횟수까지 정부가 일일이 제한하는 규제 방식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진 업체가 많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그 많은 포장업체를 일일이 단속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며 “정부가 단속을 강행할 경우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크게 반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환경부는 당초 택배 과대포장 규제를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 4월부터 시행하면서 2년간의 추가 단속 계도 기간을 뒀다. 업계에선 계도 기간이 끝나기 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줄줄이 번복되는 환경 규제
환경부는 앞으로 환경 규제를 도입할 때 ‘합리적 규제’와 ‘자율 준수’ 원칙을 중시한다는 방침이다. 택배 과대포장 금지도 일회용 컵 보증금제와 마찬가지로 획일적인 규제보다 유통업계가 자율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매출 500억원 미만 중소업체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내부에선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 기업 규모별로 환경 규제를 차등 적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환경부는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컵 금지 규제를 사실상 번복했다. 환경부는 2021년 11월부터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와 젓는 막대 사용을 금지하면서 위반 시 최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소비자와 자영업자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둔 뒤 지난해 11월부터 본격 단속하기로 했다. 하지만 환경부는 규제 적용 직전 입장을 선회해 단속을 무기한 유예했다. 플라스틱보다 두 배가량 비싼 종이 빨대를 사용해야 한다는 자영업자들이 규제 방침에 거세게 반발했다. 식당 종이컵 사용은 다시 전면 허용했다. 환경부는 업체들이 자율적으로 종이 빨대와 식당 종이컵을 줄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마다 바뀌는 환경 규제
환경단체들은 최근 들어 일회용품 등 각종 환경 규제가 잇따라 유예되자 현 정부가 환경 보호를 우선순위에서 제쳐둔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2022년 시행된 자원재활용법에 따라 일회용품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목표”라며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감축 방안을 찾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환경 규제가 정부가 바뀔 때마다 도입과 백지화를 되풀이하면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부 전직 고위 관계자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환경 정책도 크게 달라진다”며 “환경부 공무원들은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4대강 보 존치에 대한 환경부 입장이 정권마다 달라진 게 대표적 사례다.

경제계는 일회용품 사용 규제와 같은 환경 규제가 필요하다는 원칙에 동의한다. 다만 정부가 규제를 입안하는 과정에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등 규제 대상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 당시 환경단체들의 영향이 커지면서 ‘탁상 환경 규제’가 속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부처 관계자는 “일회용품 보증금제를 도입할 경우 노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이용 제약이나 소상공인이 져야 할 부담은 논의에서 뒷전으로 밀렸다”고 지적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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