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열린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장 로비는 기대에 부푼 관객들로 북적였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 빈 필과 동년배 중 최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한국의 ‘젊은 거장’ 조성진의 협연은 그간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던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90여 분간 관객들의 부푼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음악을 선보였다. 빈 필과 조성진은 피아노와 관현악의 물리적 결합을 넘어선 ‘화학적 결합’ 수준의 농도 짙은 앙상블로 관객을 빨아들였다. 마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하나가 된 듯, 이들이 선사한 하모니는 유기적이었다. 오케스트라의 교향시 연주로 채워진 2부에서는 빈 필만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 프로그램과 독보적인 음색으로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가 베이스라인을 강조하면 협연자 조성진 역시 베이스라인을 더욱 강하게 연주하며 대화를 함께했다. 특히 2악장에서 피아노와 플루트가 만든 대화는 최고의 1분이었다. 플루트가 데크레셴도로 소리를 천천히 줄여나갈 때 조성진 역시 그쪽을 바라보며 단계별로 아주 세밀하게 음량을 맞추고, 플루트 단원의 호흡까지 고려해 그 순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앙상블을 만들었다.
이때 지휘자가 템포를 더 늦출 것을 요구했는데, 플루트와 피아노 모두 보란 듯 더 아름답고 완벽하게 해냈다. 협주곡의 매력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앙상블은 리사이틀과는 필요로 하는 역량이 완전히 다르다. 오케스트라와 이렇게 깊은 농도의 음악을 만드는 조성진을 보고 있으니, 어쩌면 그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성진은 1악장 카덴차에선 이 작품의 낭만성을 극대화했고, 2악장에선 배음까지 고려해 울림을 조절했다. 3악장에선 재치 있는 악센트와 절제됐지만 위트 있는 유머가 기억할 만한 순간이었다.
앙코르는 쇼팽 왈츠 14번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 자신이 원래 가진 스크립트를 충실히 따르는 연주였다면, 왈츠는 그 스크립트를 완전히 집어던졌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요소까지 더해졌고, 순간의 깜짝 포르찬도(특히 세게)로 관객뿐 아니라 무대 위 단원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지휘자는 조금 느린 템포를 선택했는데, 템포가 빨랐다면 들을 수 없었던 주제들이 여기저기 선명하게 들렸다. 또 미묘하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현악기들의 소리 역시 느린 템포에서 더더욱 돋보였다. 앙상블을 맞추기 어려운 음악이었지만 빈 필은 지휘자의 요구에 적극 따라줬다.
물론 지휘자가 조금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정해서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지휘자의 해석을 떠나 빈 필 고유의 색깔을 느낄 수 있어 즐거웠다. 이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악보에 적힌 음표를 정확하게 연주해서가 아니었다. 단원들이 매 순간 서로의 흐름을 감지해 뉘앙스를 조절하고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그런 이유로 지난 23일 빈 필이 들려준 말러 교향곡 5번도 그랬지만,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의 순간보다 다음 악구로 넘어가는 순간순간이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자연스럽게 개별 단원이 갖춘 뛰어난 역량이 발휘될 수 있었고, 관객들은 빈 필이 가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또 이게 안드리스 넬손스의 장점이기도 하다. 넬손스는 단원들을 지나치게 통제하지 않는다. 커다란 방향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단원들에게 맡겼다. 이미 수도 없이 ‘영웅의 생애’를 연주 해온 단원들이다. 넬손스는 현재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더불어 빈 필이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한 명이다. 틸레만이 단원들에게 뛰어난 비전을 제시하며 자신의 음악을 따라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휘자라면 넬손스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도록 도왔다.
앙코르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비행중 폴카’였다. 넬손스가 신년음악회 때 빈 필과 선보인 작품이다. 여기서부터 지휘자는 빈 필에 음악을 온전히 맡겼다. 지휘자보단 단원들에게 훨씬 익숙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빈 필이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리듬과 그 리듬 사이 찰나의 미학이 관객들을 기쁘게 했는데, 역시 빈 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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