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등의결권 방패 없는 韓…네이버·KCC '신흥 백기사'로 급부상

입력 2024-10-27 18:22   수정 2024-10-28 01:14

1999년 미국계 헤지펀드 타이거펀드가 SK텔레콤을 공격한 후 재계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외부에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노리는 공격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미국 헤지펀드 소버린, 세계 2위 철강 회사 아르셀로미탈이 각각 SK, 포스코 경영권 장악에 나섰다. 재계에서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백기사’(우호주주)를 확보하려는 흐름이 이어졌다. 포스코, SK텔레콤, KT&G, 현대중공업(현 HD한국조선해양) 등은 자사주를 서로 넘기며 백기사 관계를 맺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최근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이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를 시도하자 백기사 동맹 바람이 다시 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재계에서 백기사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으로 네이버, KCC, 대한항공, 금호석유화학 등이 거론된다.

백기사로 경영권 방어
2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네이버·이마트, 네이버·CJ대한통운, 네이버·미래에셋증권, OCI홀딩스·금호석유화학, 고려아연·한화, SK텔레콤·하나금융지주, HD한국조선해양·KCC 등이 우호주주 동맹으로 분류된다. 이들 기업은 상호 지분을 보유했으며 경영진 간 관계도 돈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재계에서 ‘백기사 모시기’가 본격화한 때는 1999년이다. 당시 타이거펀드가 SK텔레콤 지분 6.66%를 매입한 뒤 이사진 교체 등을 시도했다. SK텔레콤은 포스코, KT&G, 현대중공업 등과 서로 자사주를 교환해 백기사 관계를 맺으면서 위기를 넘겼다. SK그룹 지주사 SK㈜도 2003년 소버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SK는 보유한 자사주 10.41% 상당수를 하나은행(1.91%), 신한은행(1.75%), 산업은행(1.75%), 팬택&큐리텔(0.98%), 이토추상사(0.5%) 등에 넘기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포스코도 2006년 아르셀로미탈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시달렸다. 포스코는 현대중공업, 신한은행, 국민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등을 우호주주로 두면서 위기를 넘겼다.

적대적 M&A 위협이 사그라들자 기업들은 서로의 지분을 매각하면서 백기사 동맹도 서서히 해체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MBK파트너스·영풍이 고려아연 경영권을 위협하자 재계에서 우호주주 모시기 움직임이 다시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국에는 ‘포이즌 필’ ‘황금주’ 등 뚜렷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며 “금융당국의 자사주 규제 강화도 백기사 확보 움직임에 ‘촉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업들은 보유한 자사주의 장부 가치만큼 자기자본에서 차감하는 방식으로 회계 처리를 하기 때문에 자사주가 자산 가치를 갉아먹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질 수 있어 자사주를 소각하는 대신 백기사에 매각하는 쪽을 택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백기사 수집하는 네이버
네이버, 대한항공, KCC, 금호석유화학 등이 재계 백기사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들 기업을 중심으로 주식 맞교환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네이버는 이마트(3.08%) 신세계인터내셔날(6.85%) 미래에셋증권(7.82%) CJ대한통운(7.85%) CJ E&M(4.99%) 한진칼(0.99%) 등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미래에셋증권은 네이버 지분을 1.73% 들고 있다. CJ대한통운(0.64%) CJ E&M(0.3%) 이마트(0.24%) 등도 네이버 지분을 쥐고 있다.

네이버는 한진그룹·신세계그룹·CJ그룹·미래에셋그룹과 상호 우호주주 관계를 형성했다. 네이버가 폭넓은 백기사 관계를 맺은 것은 독특한 지배구조 탓이다. 네이버 최대주주는 지분 7.78%를 보유한 국민연금이다.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지분 5.05%를 보유한 2대 주주다.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 지분율은 3.77%에 불과하다. 백기사를 바탕으로 지배력을 다진 것이다.

■ 차등의결권

경영권 방어수단의 하나로 대주주 등이 보유한 주식에 보다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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