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보기술(IT) 대기업의 10년 차 연구직 A씨(39)는 국내 이직을 고민하다가 지난달 미국 현지 이민 전문 로펌을 선임해 고학력자 독립이민(EB-2)을 준비 중이다. 매년 수천 명의 국내 최고급 인재가 A씨처럼 미국행을 택하는 것은 성과 보상에 인색하지 않은 미국 기업에서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어서다. 갈수록 떨어지는 국내 기업의 혁신 활력과 자녀의 교육 문제도 이들이 미국행을 재촉하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한국의 ‘두뇌 유출’을 제어할 방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두뇌 유출 속도가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지난해 EB-1·2 비자용 I-140을 미국 이민국에 제출한 한국인은 2982명이다. 이들 이민이 모두 받아들여진다고 단순 가정하면 3인 가족 기준 8946명, 4인 가족 기준으로는 1만1928명이 한국을 떠나는 셈이다. 이민업계 관계자는 “당장 내년에는 EB-1과 2를 합쳐 6000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이민국이 2022년부터 자격을 완화한 뒤 ‘인재 대국’인 중국과 인도 등에서도 고급 이공계 인재 유출이 문제가 됐지만, 한국보다 심각하지는 않다. 2023년 EB-1·2로 이민한 중국인은 1만3378명, 인도인은 2만905명으로 한국인(5684명)보다 절대 수는 많지만 10만 명당 기준으로 전환하면 한국 고급 인력 유출이 각각 8배, 11배 많다.
EB-2(NIW)는 2010년 이후 국내 전자 대기업 전문연구원이 엔비디아, 퀄컴, 마이크론 등으로 이직하면서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반도체 회사 연구원 B씨는 “2022년 최고조에 달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나고, 국내 대기업은 인공지능(AI) 혁명에 올라타지 못하면서 엔지니어들의 동요가 더욱 심해졌다”고 전했다.
미국 정착에 실패하고 귀국하더라도 몸값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5년 차 프로그래머 이모씨(30)는 “국내 개발자 사이에서는 미국 빅테크 취업 경력을 ‘연봉 두 배 이벤트’라고 부른다”며 “굳이 이민이 아니더라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미국 취업 노력을 하는 게 대세”라고 말했다.
EB-2 비자 막바지 절차를 밟고 있는 10년 차 변호사 C씨는 캘리포니아주 IT기업에서 사내변호사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는 “스톡옵션까지 포함하면 당장 연봉이 60%가량 오른다”며 “한국 대기업에서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지만 미국 로스쿨 동기와 연봉이 세 배 넘게 벌어지다 보니 미국행을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술 분야에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자가 우선”이라며 “고숙련 인재를 정당히 대우하고 존경해주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시온/안정훈/정희원 기자 ushire90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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