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영상 속 젊은 무용수 모습과 함께 무대에서 나이 든 현재의 무용수가 춤을 춘다. 무용이 ‘찰나의 예술’ ‘젊음의 예술’이라는 편견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프랑스 공연예술 거장 필립 드쿠플레의 ‘샤잠!’은 무용에 대한 여러 가지 고정관념을 부수는 수작이었다.
지난 25일 개막 공연 전, 드쿠플레는 무대에 등장해 자신의 공연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1998년 초연 후 26년이나 지났지만 “기술적인 이유, 예술적인 이유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완성”이라는 고백이었다. ‘샤잠!’이 새로운 시대의 기술과 예술을 포용하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공연이라는 점을 은유한 것이기도 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압도하는 현재, 드쿠플레의 공연에 쓰인 기술이 최첨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존 기술을 천재적으로 활용하는 독창성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샤잠!’은 초연에서도 스크린 영상이나 거울, 액자를 활용해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그런데 2024년의 ‘샤잠!’은 기술의 적용을 바탕으로 ‘시간의 축’을 새롭게 세워 과거 무용수와 현재 무용수의 모습을 무대에 대비시켰다. 관객은 과거와 현재의 무용수가 같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분명 같은 동작을 하지만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 든 무용수 모습에서 기품이 더 두드러졌다.
영화 연출가이기도 한 드쿠플레는 액자 프레임을 활용한 무대 연출로 영화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액자 프레임의 배치에 따라 무대 위 무용수들은 스크린 속 가상 인물과 실재 인물을 넘나들었다. 반투명 거울을 이용한 무대가 등장하면서 실체와 허구의 경계는 더 희미해졌다. 거울 반쪽에서만 신체를 드러내 보이며 움직이자 거울에 반사된 면이 늘거나 줄면서 신체가 괴이하게 보이는 게 현대미술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11명의 무용수 가운데 6명이 초연 멤버들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인이 된 몸, 거구가 된 몸 등 관객은 무대 위 다채로운 신체를 만날 수 있었다. 이상적인 신체 조건부터 따지는 무용계에 드쿠플레가 따가운 일침을 던진 것 같았다.
이들은 과거처럼 완벽한 각도의 아라베스크나 점프, 착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꾸밈없는 자연스러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무대를 노련하게 채웠다. 숙성된 와인처럼 이들의 노화는 아름다웠다. 나이 들어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여전한 미완성의 공연에서 시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드쿠플레의 무용을 빛내준 공신이었다. 프랑스의 카바레, 서커스, 재즈를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음악이 세련된 인상을 남겼다.
초연 무용수들은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무대에 올라 어눌한 한국어로 이어질 무대의 실험적 요소를 소개했다. 위트있는 대사와 몸짓 덕분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위트란 최고 수준의 지성을 의미한다는데, 드쿠플레의 무대에선 그것이 끊이지 않았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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