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메 와인 보졸레 누보는 ‘언제나 산뜻’[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입력 2024-11-05 16:38   수정 2024-11-05 16:39

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31>




유럽 중세 시대의 긴 터널이 끝나가던 1395년. 프랑스 부르고뉴 포도 농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프2세 르 하르디 공작이 자신의 영지 내 식재 가능한 포도 품종을 ‘피노 누아’로 단일화시키라는 것. 칙령을 통해 ‘가메’ 품종의 재배를 금지했다.
공작은 지방 시찰 중 어느 날 가메로 담근 와인을 마시고 심한 숙취에 시달렸다. 화가 난 그는 가메를 두고 ‘매우 사악한 포도 품종’ 이라며 뿌리까지 몽땅 뽑아버리라고 진노했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가메 퇴출’ 사건은 이처럼 단순하게 시작됐다고.

그러나 농부들 생각은 달랐다. 재배가 까다로운 피노 누아보다 손이 덜 가고 생명력 강한 가메 농사를 훨씬 선호했다. 포도를 팔아 돈을 마련해야 빵도 사고 아이들 학비도 마련하는 등 생계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혹한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경작이 쉬운 가메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가메는 구에블랑과 피노 누아의 자연 교배로 나온 조생종이다. 피노 누아보다 2주일 정도 이른 수확이 가능해 가을철 자연재해를 피하고 시장에서도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어찌 지엄한 칙령에 대항할 수 있으랴. 이 비운의 포도 품종은 결국 부르고뉴 지방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보졸레로 밀려났다.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다행히 무난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 사정을 파악한 공작도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예외 지역으로 인정했다.

지금도 보졸레 지역에서는 가메 품종으로 다양한 와인이 생산된다. 그중 국내 초보자에게도 잘 알려진 와인은 보졸레 누보. 당해 9월에 수확한 포도를 4∼6주간 숙성시킨 뒤 11월 셋째 목요일 0시를 기해 전 세계에 동시 출시하는 이벤트로 유명하다.

발효 즉시 판매에 나서는 이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신선한 과일 향과 가벼운 타닌감. 2000년대 초반 최고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과대포장이 벗겨지고 장기 숙성 와인에 대한 인기가 지속되면서 열기는 한풀 꺾이긴 했다.

박수진 WSA와인아카데미 원장은 “햇와인인 보졸레 누보를 통해 그해 빈티지 특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잘 익은 붉은 과일이나 딸기·자두·체리 등 과일 향에 집중해 마셔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에는 보통 10여 종이 들어오는데 보졸레 누보를 처음 마시는 경우 다소 당황할 수 있다. 이는 숙성된 와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이 추천한 2024 보졸레 누보는 빌라주급(지역산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 두 종류. 먼저 ‘조르주 뒤보프 보졸레 빌라주 누보’는 부드럽고 가벼운 보디감, 풍부한 과일향이 특징이다. 집중하면 초보자도 감초 향을 단박에 잡을 수 있다. 간이 밴 육류 요리, 파스타, 치즈 등과 잘 어울린다. 보졸레 북부 39개 마을에서 생산되는 이 와인은 현재 GS25에서 사전판매 예약을 받고 있다.
다음은 ‘피에르 페로 보졸레 빌라주 누보’. 보랏빛 감도는 루비 컬러와 생동감이 특징. 첫 모금에서 산뜻함이 느껴진다. 풍부한 과일 향과 적당한 산도 때문이다.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견고하면서도 신선한 와인’이라고 극찬했다. 수입사는 신동와인.

보졸레 누보 서빙 온도는 일반 레드 와인보다 조금 낮은 12~14도가 적당하다. 그래야 햇와인의 특징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시음 적기는 11월 출시일부터 12월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로 매우 짧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고향 땅, 끝단으로 밀려난 포도 품종 가메는 오늘도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낙엽 지는 가을, 생기 발랄한 보졸레 누보 한 잔으로 애잔한 마음 달래보면 어떨지.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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