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진심인’ 회사가 만든 특별한 공연, 베스트슬립 ‘수면콘서트’

입력 2024-11-04 08:31   수정 2024-11-04 08:32



“떼창과 환호의 굴레를 벗어난 공연.” 인디밴드 10CM(본명 권정열)가 10월 24일 세빛섬 공연장 무대 위에서 이번 공연을 정의했다. 어둠 속 관람객들은 모두 이불을 덮고 푹신한 5성급 호텔용 침대에 편안히 앉은 채 그의 공연을 감상했다. 눕는 것 역시 문제가 안 됐다. 10CM는 팬이 많기로 유명한 밴드지만 이날 공연만큼은 박수조차 없이 조용히 진행됐다. 이를 보는 공연자 역시 “바람직하다”라는 반응이었다.

이날 오후 7시 시작을 알린 ‘베스트슬립 수면콘서트’는 시종일관 여느 음악공연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관객을 재우기 위해 만든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공연의 콘셉트는 행사 주최 측이 침대 매트리스 전문회사로 유명한 ‘베스트슬립’이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5월 첫 시작을 알린 수면콘서트는 모든 표가 매진되는 성원 덕에 이번에 두 번째를 맞았다.

주인공은 베스트슬립 창업주이자 ‘수면 전문가’로 알려진 바른수면연구소 서진원 소장이다. 무려 12년여간 준비한 수면콘서트의 서두를 장식한 강의에서 그는 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전을 제시했다. 잠을 줄이거나 제대로 못 자면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해치며 “잠을 적게 자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통념 또한 점차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서진원 소장은 “하룻밤을 꼬박 새웠을 때의 인지능력은 소주 한 병을 ‘원샷’했을 때와 같은 혈중알코올농도 0.08 수준”이라며 “밤을 새운 직원이 회의에서 제대로 역량을 펼칠 확률이 적으므로 잠을 안 자고 일하는 것을 칭송하는 사회 분위기는 다소 바뀔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침 7시까지 잠자는 콘서트

‘최고의 잠을 경험하세요’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이날 베스트슬립 수면콘서트의 모든 시설과 공연 리스트는 관람객의 수면을 최적화하는 데 맞춰졌다. 목요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오전 7시 30분까지 12시간 이상 동안 관람객에겐 라마다, 제주 KAL 등 5성급 호텔에 공급하는 최상급 매트리스가 제공됐다. 여자 전용석 39개, 남자 전용석 38개까지 총 77개 자리가 마련됐다.

이 밖에 최고급 소재인 클라우드 화이버가 내장된 베개와 호텔용 침구뿐 아니라 수면안대, 수면양말, 귀마개, 필로우 스프레이 등으로 구성된 20만원 상당의 슬리핑 키트도 1세트씩 지급했다. 침대마다 놓여진 협탁에는 은은한 조명이 있었고,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휴대폰 감옥에는 숙면을 방해하는 스마트폰을 넣을 수 있었다.

공연리스트는 서진원 소장의 수면강의에서 시작해 싱어송라이터 펀치와 10CM 등 유명 가수의 잔잔한 음악 공연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밤 9시가 지나면서부터 점차 필라테스 강사 허윤과 함께하는 근육을 이완시키는 스트레칭, 수면을 돕는 특수 음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서 소장의 숙면비법 강의에선 쾌적하게 잠드는 최적의 환경으로 21~23℃ 온도와 40%가량의 습도를 제시했다. 잠들기 전부터 가벼운 스트레칭과 집안 조명 밝기 낮추기, 카페인 끊기, 무엇보다 잠자리에서 스마트폰 하지 않기 등이 강조됐다. 서 소장은 “학계에 따르면 불면증 사례가 가장 스파이크처럼 급증했던 시기가 바로 스마트폰이 출시된 때였다”며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청색광)가 입면 시간을 30분 지연시킨다”고 설명했다.

강의 이후 차례를 맡은 펀치와 10CM는 차분하고 잔잔한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10CM는 무대에 마련된 침대에 앉아 콘서트 주제에 걸맞은 ‘매트리스’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박수 금지’, ‘떼창 사절’, ‘졸음 환영’ 등 일반 공연과는 다른 관람 규칙 속에 관람객들은 조용히 공연에 녹아들었다. 천장 스크린을 보며 누워서 공연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필라테스에 뒤이은 피아니스트 윤한 경희대 교수의 수면음악 연주를 기점으로 침대 속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서진원 소장의 수면음악 디제잉과 윤 교수, 베스트슬립이 공동 제작한 ‘MELSOMNUS’가 잠든 관람객의 숙면을 도왔다. 수면집사가 배치돼 관람객이 원하면 잠에 도움이 되는 차나 다과를 제공했으며 코골이가 심한 관객은 별실로 안내되기도 했다.

푹 잔 관객들은 상쾌한 주말 아침을 맞이했다. 피아니스트 최호경, 현악 4중주의 모닝 클래식을 들으며 기상했다. 지난 밤에 이어 허윤 강사의 스트레칭 코칭이 아침에도 등장했다.
잠에 대한 인식 바뀔 것

A부터 Z까지 관람객이 푹 잘 수 있도록 기획된 이번 콘서트의 콘텐츠 구성은 어느 날 갑자기 짜여진 것이 아니다. 서진원 소장이 2012년 바른수면연구소를 이끌어가면서부터 수면 페스티벌을 구상했다는 것이 베스트슬립의 설명이다.

당시부터 서 소장은 공연에 사용할 매트리스부터 수면음악, 향기 관련 제품까지 제작에 들어갔다. 최적의 매트리스와 수면환경 연구를 위해 쉐라톤, 리츠칼튼, 포시즌 등 전 세계 100여 개 특급 호텔을 방문하며 연구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엄마 나 안 졸려!’라는 수면동화를 집필해 이날 낭독하기도 했다.

서 소장은 1989년부터 매트리스를 전문으로 만들어온 기업의 후계자로서 베스트슬립이 지금의 브랜드 위상을 갖추도록 일조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유전체 및 건강 빅데이터’를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서울대병원 수면의학센터 수면 전문가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대한수면의학회 평생회원이자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단의 수면 컨설팅을 진행한 바 있는 ‘잠 전문가’이다.

서 소장은 우리 사회 수면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 49분으로 최하위권이다. OECD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30분 이상 짧다. 반면 연평균 노동시간은 2083시간으로 OECD평균(1686시간)을 크게 웃돈다.

그러나 기존 틀을 바꾸는 창의적인 활동이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선 개개인의 수면시간이 충분해야 한다는 게 서 소장의 설명이다. 그는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는 ‘몽롱한 상태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경영이라는 것은 사소한 작은 의사결정의 합인데 수면의 품질이 떨어지면 그 의사결정의 품질이 계속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에릭 슈밋뿐 아니라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설립자,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등 글로벌 IT 리더 다수는 매일 8시간 이상 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많이 자야 강해지며 강해야 많이 잘 수 있는 동물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하루 1~2시간 눈을 붙이기 힘든 초식동물과 달리 맹수인 사자는 하루 10시간, 우두머리 사자는 하루 20시간을 잔다.

서 소장은 “불과 10~20년 전까지만 해도 소주 한 짝을 먹었다는 등의 과음 경험을 무용담으로 여겼지만 요즘 사람들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행동에 대해 ‘자기관리를 못한다’는 반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잠을 쪼개어 가며 일하거나 밤새워 보고서 쓰는 것을 자랑하는 지금의 수면문화 또한 바뀌어갈 것으로 확신한다”고 전망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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