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短刀)를 든 니키아에게 겁먹고 도망치는 공주 감자티의 발걸음은 높은 ‘점프’로 표현됐고(1막), 니키아가 독사에 물려 죽자 연인 솔로르는 공주를 따라 무대 뒤편으로 달아나버렸다(2막). 대단원의 막. 죽은 연인(니키아)의 환영을 본 솔로르가 멍하니 홀로 선 채 공연이 끝난다.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지난달 같은 장소에서 공연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와 확연하게 다른 연출을 보여줬다. 국립발레단은 정기공연 ‘라 바야데르’를 개막 전날인 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언론에 미리 공개했다.
‘라 바야데르’는 프랑스어로 인도의 무희라는 뜻으로 댄서 니키아와 ‘니키아의 연인’ 전사 솔로르, 공주 감자티의 삼각관계가 줄거리를 이룬다. 러시아 황실에서 탄생한 고전 발레지만 인도의 힌두사원이 배경이어서 무대와 의상, 상체 동작 등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유니버설발레단이 화려한 안무와 다수의 무용수로 볼거리를 강조했다면 국립발레단은 마임에 춤의 요소를 삽입해 작중 인물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연출한 점이 눈에 띄었다. 막과 막 사이, 음악만 흐르던 장면에 주요 인물이 등장해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를 암시하기도 했다. 죽음에 이른 니키아를 버려두고 줄행랑치는 솔로르는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국립발레단의 결말은 유니버설발레단과 확연히 달랐다. 유니버설발레단 공연에서는 니키아와 솔로르가 망령의 세계에서나마 이어지지만 국립발레단 무대에서는 이들의 사랑에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잠시 꿈속에서 니키아를 만난 솔로르는 다시는 니키아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며 무대가 마무리된다. 안무자가 상투적인 결말(영혼의 재회)을 거부하고, 솔로르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결과다.
‘라 바야데르’의 백미는 역시 3막 ‘망령들의 군무’였다. 32명의 발레리나가 한 명씩 경사진 언덕을 내려오는 장면. 새하얀 옷, 머리와 팔로 이어지는 얇은 베일은 그들이 이승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장치다. 절제된 아라베스크, 각도기로 잰 듯 그 누구도 오차 없이 움직이는 다리. 균형 감각과 탄탄한 기본기, 예술성을 고려해야 하는 무용수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이 군무는 ‘발레 블랑’(Ballet Blanc·백색 발레)으로 손꼽힌다.
‘라 바야데르’에서도 국립발레단은 수석무용수가 아니라 여러 등급의 무용수를 주역으로 골고루 기용했다. 솔로르를 연기한 허서명을 제외하고 주역으로 나선 수석무용수는 없었다. 하지만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닷새 공연 중 조연재(솔리스트)와 안수연(코르 드 발레·군무단원)은 니키아와 감자티를 모두 연기한다.
11월 1일과 3일로 예정된 김기민과 박세은의 무대는 예매 창구가 열린지 3분 만에 매진을 기록했다. ‘라 바야데르’는 다음달 3일까지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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