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할 때만큼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없는 것 같아요.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악보 쓰는 데만 매달리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면 ‘쓰레기’ 같거든요. 매 작품 괴로움과 절망감에 몸서리를 치고서야 비로소 고통을 멈출 수 있죠.”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평범한 작곡가가 한 말이 아니다. 올해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의 아시아 최초 수상자이자 세계적 명성에 빛나는 작곡의 거장(巨匠) 진은숙(63)의 이야기다. 지난달 26일 경남 통영에서 만난 진은숙은 이렇게 덧붙였다.
“한 번도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이 대단하다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신날 텐데 말이죠.”
그가 지금껏 이뤄온 수많은 성과를 보면 이 말들이 지나친 겸손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진은숙은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의 주요 작품으로 전체 프로그램을 채운 음반 ‘진은숙 에디션’(2023)을 따로 발표할 정도로 현대음악계의 중심과도 같은 존재다. 그가 받은 상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그라베마이어상’(2004), ‘쇤베르크상’(2005), ‘모나코 피에르 대공 작곡상’(2010), ‘시벨리우스 음악상’(2017), ‘크라비스 음악상’(2018), ‘바흐 음악상(2019)’, ‘레오니 소닝 음악상’(2021) 등 지난 20년간 주요 음악상이 모두 그의 품으로 돌아갔다.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같은 명문 악단에서 연이어 신작을 위촉해 2028년까지 작곡 스케줄이 차 있다는 진은숙. 지난달 말 거주지인 독일 베를린을 떠나 한국의 젊은 작곡가 양성 프로그램인 통영국제음악재단(TIMF) 아카데미에 참석하기 위해 통영에 머문 그를 만났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받은 뒤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창작자는 어떤 상을 받는다고 해서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아요. 다만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은 제가 작곡을 공부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독일이란 나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기에 의미가 남다르죠.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강해 이방인에게 인색한 땅에서 한 명의 작곡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은 느낌이랄까요. 내년이면 작곡가로 활동한 지 40년째가 되니까,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거죠.”
▷올해 베를린 필의 ‘진은숙 에디션’이 ‘디아파종 골드’ 앨범으로 선정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베를린 필 같은 명문 오케스트라 공연엔 돈 내고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내한했을 땐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연주를 훔쳐 들었을 정도였죠. 그런 오케스트라가 제 작품을 연주하는 것도 놀라운데, 앨범이라니요.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어요. 디아파종 골드 앨범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란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탄했죠.”(디아파종 골드는 프랑스의 클래식 전문지 ‘디아파종’에서 발표하는 이달의 추천 음반이다.)
▷업적만 보고 작곡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거라는 오해도 있었겠습니다.
“가끔요. 그런데 제 삶은 한순간도 순탄한 적이 없었어요. 어렸을 땐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 탓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독일에선 10년 넘게 긴 무명 시절을 견뎌야 했죠. 스승 죄르지 리게티(1923~2006)에게 혹평을 듣고 3년간 단 한 음도 작곡하지 못한 슬럼프의 시간도 있었고요. 돌이켜 보면 섭식 장애에 우울증까지 겹친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나 싶은데, 음악이 곧 제 인생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아요. ‘무조건 살아남는다’는 일념으로 독하게 버틴 게 방법이라면 방법이었죠.”
▷내년 5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신작 오페라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초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1900~1958)와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을 소재로 한 오페라인데요. 이제 1막을 완성했고, 2막을 쓰기 시작했어요. 사실 지금 이렇게 말을 하거나 밥을 먹을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에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악보뿐 아니라 오페라 스토리, 대본까지 모두 직접 쓰고 있거든요.”
▷작곡가가 대본까지 쓰는 일은 흔치 않은데요.
“처음엔 엄두조차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을 읽다가 마주한 파울리란 인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보여주기에 이만한 주인공이 없다고 생각했죠. 힘들 걸 알고 시작한 일인데 정말 쉽지 않아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0여 년 평생을 작곡에 매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살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을 끄집어내고,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서 악보에 적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도 연필과 종이 악보로 작곡하나요.
“네. 무조건요. 작곡은 나의 혼을 담아내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절대 쉽고 간단하게 그려낼 수 없어요. 음표 하나하나를 충분히 생각하고 느끼고, 다음 음과의 연결을 떠올리며 직접 손으로 적어내야만 비로소 나의 정신이 투영됐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고집이죠.”
▷내년이면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임기 5년 중 4년 차에 접어듭니다.
“내년 주제는 ‘내면으로의 여행’으로 잡았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SNS를 통해 타인과 지극히 밀착된 삶을 유지하지만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잖아요.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남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샅샅이 들여다보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2025년 음악제의 상주음악가로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선정했습니다.
“상주음악가, 상주작곡가를 뽑는 기준은 단 하나예요. ‘무조건 음악을 잘할 것’이죠. 임윤찬은 어리지만 음악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보여주는 대단한 피아니스트예요. 잠재력도 엄청나죠.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서 상주음악가 자리를 제안하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꺼이 하겠다’고 해서 기뻤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하셨는데 추구하는 음악은 무엇입니까.
“음악 중에도 ‘패스트푸드’ 같은 음악이 있어요. 처음 들었을 땐 참신하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만큼 자극적이지만 두 번 들으면 식상하고, 세 번은 듣고 싶지 않은 그런 음악이요. 반면 처음 들었을 땐 무슨 음악인지 잘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귀에 맴돌고,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도가 높아지며 더 깊이 빠지는 음악이 있죠. 후자가 ‘진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가 일생을 바치고 있는 그런 음악이죠.”
통영=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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