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1900년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였다. 제국의 수도에 넘실대는 풍요 속에서 예술가들은 재능을 꽃피웠다. 극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썼다.
“빈은 축제의 도시였다. 매일이 새로웠고, 듣지 못했던 것과 보지 못했던 것들이 도처에 가득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아는 것, 인생을 즐기는 것, 그리고 축제를 여는 것이 빈 사람들의 특별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그 속은 곪아 들어가고 있었다. 600여 년간 유럽을 호령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약진에 빛이 바랜 지 오래. 10개 넘는 민족을 한데 묶어온 제국의 힘은 노(老)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목숨과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부패한 사회 지도층은 향락에 몰두했고, 도시의 뒷골목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신음했다.
풍요와 향락, 빈곤과 멸망에 대한 예감이 공존하는 이 도시의 모순적인 풍경은 다양한 생각과 예술을 낳았다. ‘빈 분리파’를 이끈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청춘의 초상을 그린 에곤 실레, 20세기 그래픽아트를 바꾼 콜로만 모저,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 미술사에 길이 남은 거장들이 활동한 것도 이때다. 비록 10여 년 뒤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총탄에 잃고(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해체되지만, 천재 예술가들이 남긴 찬란한 걸작들은 영원히 남았다. 극작가 카를 크라우스가 “빈은 세계의 종말을 위한 실험실이었지만 거기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났다”고 말한 이유다.
오는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경제신문사가 공동 개최하는 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은 클림트와 실레, 모저와 게르스틀이 남긴 걸작 원본을 국내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다. 전시의 주요 작품과 이 작품들을 소장한 빈 레오폴트미술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전시를 미리 돌아봤다.
비엔나展, 주요 작품들
오는 11월 30일 개막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도 비슷한 기대를 받는다. 큐레이터는 양승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로, 합스부르크전과 동일하다. 벌써 전시장은 당시 빈의 분위기와 새로운 미술 사조인 ‘빈 분리파’, 이들이 만들어낸 걸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새단장 중이다. 개막을 한 달 앞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주요 작품을 통해 전시 흐름을 미리 간략하게 살펴봤다.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새로운 미술은 늘 “고리타분한 것들은 가라”고 소리치는 젊은 세대의 ‘반항’에서 시작한다. 인상주의가 그랬고, 이번 전시의 주인공 격인 빈 분리파 화가들이 그랬다. 1897년 빈에서 활동하던 젊은 화가들은 “각 시대에는 그 시대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구호 아래 분리파를 결성하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 수장이 당대 최고 인기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였다. 이 그림은 클림트 작품 특유의 개성과 매력이 잘 드러난 초상화다. 그의 섬세한 그림은 우아하고 관능적이며 매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퇴폐적이고 도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작품이 보수적인 기성 오스트리아 미술계와 때때로 마찰을 빚은 이유다.
에곤 실레 '작은 마을'
에곤 실레(1890~1918)가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서양 미술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클림트 사후 실레는 빈 분리파의 새로운 리더로 떠올랐다. 그는 클림트의 제자지만 완전히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냈다. 고통, 불안, 성(性), 죽음 등을 강렬한 화풍으로 가감 없이 표현한 그의 독창적인 초상화들은 10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젊음의 초상’으로 전 세계인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접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그의 독특한 풍경화(그림)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는 소설가 한강(54)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대표작 <채식주의자> 초판본 표지가 실레의 그림 ‘네 그루의 나무’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됐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반신 자화상'
‘새 시대의 새 예술’을 추구한 게 분리파였지만, 그런 분리파조차 고리타분하다고 여긴 화가가 있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이다. 게르스틀의 미술은 너무 실험적이고 급진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잘 이해받지 못했다. 후광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푸른빛 배경, 파격적인 반나체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 단적인 예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실패한 사랑에 좌절한 그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르스틀의 별명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인 이유다.
오스카 코코슈카 '헤르만 슈바르트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는 분리파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한 화가다.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형태를 썼다는 점에서는 다른 분리파 화가와 비슷했지만 그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갔다. 내면의 깊은 감정과 정신적 상태를 거친 붓질로 역동적으로 표현한 코코슈카의 화풍은 훗날 세계 현대 미술의 주류가 된 표현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콜로만 모저 '와인잔, 메테오 100번'
전시장에 그림만 나와 있는 건 아니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한 축은 ‘디자인’이다. 예술은 박물관이나 상류층 대저택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쓰는 컵과 의자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게 분리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분리파는 ‘빈 공방’을 설립해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식기와 가구 등을 제작했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시작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빈 공방은 중산층도 살 수 있는 합리적인 상품 가격을 매기기 위해 비용을 절감하려고 노력했다. 디자인과 생산 등 여러 공정을 각기 다른 회사에서 담당하는 분업이 대표적이다. 빈 공방에서 분업 방식으로 생산한 첫 번째 제품이 이 와인잔이다. 상품 디자인부터 순수예술까지 다양한 시각예술을 통해 당시 빈의 모습과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이번 전시만의 매력을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는 콜로만 모저(1868~1918). 분리파 창립 멤버였던 그는 다재다능한 만능 예술가다. 그래픽, 포스터, 제품 디자인 등에 매진하던 그는 훗날 회화에도 손을 뻗는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디자인한 제품은 물론이고 회화도 걸려 있다.
에곤 실레 컬렉션 완성한 레오폴트 부부
반세기에 걸쳐 수집한 5200여 작품 소장
세기말 자유 꿈꿨던 '빈 분리파' 걸작부터
표현주의 거장들의 파격 실험작까지 보유
오스트리아 빈의 ‘무제움스크바르티어(Museums Quartier·박물관 집합단지)’ 중심부에 자리 잡은 레오폴트미술관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해 생겨난 ‘빈 모더니즘’ 미술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은 낡은 전통에 맞서 도전과 실험에 나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등 ‘빈 분리파’ 거장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개관한 지 20년이 조금 넘은 젊은 미술관이지만,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빈미술사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유다.
레오폴트미술관은 ‘위대한 수집가’ 루돌프 레오폴트(1925~2019)가 반려자인 엘리자베스 레오폴트(1926~2024)와 함께 평생에 걸쳐 수집한 소장품 5200여 점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수많은 유명한 ‘큰손’ 수집가 사이에서도 레오폴트는 특별하다. 단순히 부를 축적하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값진 작품을 수집한 게 아니라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미술사 한 페이지의 파편을 모았기 때문이다.
1925년 빈에서 태어난 루돌프 레오폴트는 안과의사로 활동했다. 의대생이던 1947년부터 미술품을 수집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던 당시 그가 눈여겨본 건 무명의 화가 실레였다. 1890년에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한 1918년 생을 마감한 실레가 종말 속에서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긴 전쟁으로 유럽이 힘을 잃어가는 시기에 청춘을 맞은 루돌프 레오폴트는 실레의 파격적인 그림에 필연적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실레는 1960년대까지 적나라한 누드 드로잉이나 그렸던 외설적인 화가란 이유로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루돌프 레오폴트는 이런 실레의 희미한 흔적을 끈질기게 쫓았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들고 작품 소유자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팔아달라고 졸랐는데, 생전에도 주목받지 못한 화가였던 탓에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42점의 그림과 원본 그래픽, 소묘, 판화 등 220여 점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에곤 실레 컬렉션’을 보유하게 된 배경이다.
루돌프 레오폴트는 1955년 오스트리아 모더니즘 전시에 실레의 작품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런던, 뉴욕, 뮌헨, 도쿄, 함부르크 등에서 컬렉션을 소개하며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실레 외에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 1900년 세기 전환기 빈에서 활동한 숨은 표현주의 거장들의 작품까지 한데 모으며 빈 모더니즘의 파격적 실험이 조명받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인 수집가의 컬렉션이 모두가 향유하는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된 건 70대에 접어든 루돌프 레오폴트가 1994년 미술관재단을 설립하면서다. 루돌프 레오폴트는 당시 5억7000만유로(약 8540억원)가 넘는 것으로 평가된 자신의 컬렉션을 정부가 시세의 3분의 1 수준에 매입하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그가 원한 건 자신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을 세우고 종신 관장직을 맡는 것. 수천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갖고도 빈 교외의 소박한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평소 모습과 어울리는 조건이었다.
2001년 개관한 레오폴트미술관은 하얀 석회암으로 외관이 덮인 정육면체 모양의 모던한 건물이 특징이다. 전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미술관 앞 광장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실레와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은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다. 다만 당분간은 관람객의 표정에 적잖은 아쉬움이 나타날 전망이다. 클림트의 ‘수풀 속 여인’, 실레의 ‘작은 마을’ 등의 걸작이 11월 30일부터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느라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다.
클림트 황금빛 키스가 있는 벨베데레 궁전
에곤 실레(1890~1918)는 우수(憂愁)를 그려내고 싶었다. 자화상과 초상화뿐 아니라 풍경화에도 유독 강한 끌림을 느낀 건, 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곳곳에 묘한 ‘멜랑콜리(melancholy)’가 서려 있어서다. 왈츠처럼 우아하지만 빛바래듯 쇠락해버린 제국의 풍경은 실존에 대한 불안을 투영하기 좋은 대상이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비엔나전)을 관람한 후 동유럽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실레와 그가 추앙했던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예술 발자취를 좇아보는 것. 실레는 10년 남짓의 짧은 활동으로 작품 수가 많지 않고, 손상이 가기 쉬운 금박을 재료로 걸작을 남긴 클림트의 주요 작품은 영구반출 금지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옛 제국의 땅을 밟지 않는 이상 직접 원화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블타바강 위에 떠 있는 한 떨기 장미. 체코의 소도시 체스키크룸로프는 실레가 풍경화를 그리던 장소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이곳을 자주 찾아 보헤미아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2011년 소더비 경매에서 약 426억 원에 팔린 ‘빨래가 널린 집’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 풍경’ 등의 배경이다. 소박한 도시와 붉은 풍의 건물, 강변을 따라 굽이진 길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유럽 특유의 쓸쓸함이 묻어 있다.
체스키크룸로프 도심엔 에곤 실레 아트센터가 있다. 실레의 스케치 등 습작과 메모, 가족과 함께한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이른 나이에 요절한 탓에 남긴 작품 수가 적은 만큼, 실레의 흔적을 마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클림트와 실레의 ‘빈 모더니즘’ 정수는 이름 그대로 빈이 품고 있다. 가장 많은 에곤 실레 컬렉션을 가진 레오폴트미술관과 함께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벨베데레미술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실 회화 전시장으로 쓰인 벨베데레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24점에 달하는 클림트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그림)가 벨베데레 상궁에서 전시돼 있다. 꽃이 만발한 초원 위 황금빛 휘광이 감싼 공간에서 서로에게 황홀하게 취해 있는 연인이 그려진 그림으로, 클림트에게 ‘황금의 화가’란 이름이 붙게 한 작품이다. 외설스러우면서도 고혹적인 ‘유디트’ 등도 볼 수 있다.
성수영/유승목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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