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을 말리겠다."
지난달 사생활 문제로 데뷔 직후 활동을 중단했던 그룹 라이즈의 승한이 팀 복귀를 알리자 이틀 동안 팬덤 내에서는 불매 움직임이 벌어졌다. 팬들은 "우리는 ATM기가 아니다"면서 논란이 있는 멤버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굿즈와 예약 판매 중이던 화보를 취소 인증샷을 게재하며 불매 운동을 펼쳤다. 멤버 원빈까지 나서 글을 올리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팬들은 대필 의혹을 제기하며 반감을 드러냈다. 결국 승한은 복귀 선언 이틀 만에 팀 탈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9월 라이즈로 데뷔한 승한은 연습생 시절 사적으로 촬영한 영상과 사진이 온라인상에 유포되며 논란이 커지자 같은 해 11월 그룹 활동을 무기한 중단했다. 그사이 라이즈는 원빈, 은석, 앤톤, 소희, 성찬, 쇼타로 등 6명 체제로 활동을 이어가며 SM의 차세대 보이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다수의 국내 팬덤은 라이즈의 성장에 승한의 지분이 약소하다는 점에서 "그를 멤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불매운동은 이를 보여준 강력한 움직이었다는 평이다.
과거 소속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CD를 파기하던 소녀팬들이 성장해 팬덤 시장을 이끄는 큰 손이 됐고, 성숙한 팬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평이다. 이는 라이즈 뿐 아니라 다른 아이돌 팬덤에서도 비슷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과거엔 빅뱅의 팬이었고, 최근엔 NCT위시의 팬이 됐다는 30대 김은지(가명) 씨는 "팬 장사 하면서, '애들의 코묻은 돈'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며 "정당한 경제 활동을 하고, 당당하게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몇년 사이 팬들이 소속사의 결정이나 행보에 반발하며 '불매 운동'을 벌이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올해 초 에스파의 '드라마' 앨범에 대해 중국 카리나 바의 불매 운동이 있었는데, 이 역시 아티스트에 대한 반감이 아닌 소속사의 포토카드 콘셉트 중복 등 전반적인 관리 미흡에 따른 불매 운동이었다. 중국 앨범 공구 물량 감소에 SM엔터테인먼트 매출 감소에 대한 우려가 불거져 증권가에서는 목표가를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최근 업계에서 눈길을 끄는 불매 운동은 세븐틴 팬덤 캐럿과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가 주도하는 하이브 불매다. 특히 최근 발매된 세븐틴 미니 12집 앨범 추가 구매 취소 결제창 인증이 SNS를 통해 줄을 잇고, 이들 게시물에는 '하이브 불매', '탈하이브'와 같은 해시태그도 더해지고 있다.
이들은 최근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공개돼 논란이 됐던 하이브의 내부 문건을 문제 삼고 있다. '업계 동향 주간 리포트'라며 매주 시(C)등급 임원들에게 발송됐다는 이 문서는 타사 아이돌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담겨 있어 충격을 안겼다. 특히 공개된 20여장의 문건에는 음악적인 내용이나 트렌드 분석 없이 단순 외모 품평 등이 줄을 이뤄 더욱 문제가 됐다.
결국 세븐틴 멤버 승관까지 나서 자신의 SNS에 "그대들에게 쉽게 오르내리면서 판단 당할 만큼 그렇게 무난하고 완만하게 활동해온 사람들이 아니다. 충분히 아파보고 무너지며 또 어떻게든 이겨내면서 무대 위에서 팬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들의 서사에 쉽게 낄 자격이 없다"며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우리는 당신들의 아이템이 아니다. 맘대로 쓰고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재상 하이브 CEO은 "시장 및 아티스트 팬 여론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리더십에게만 한정해 공유됐으나, 해당 문서의 내용이 매우 부적절했다"고 사과했지만, 팬덤의 분노는 이어졌다. 특히 세븐틴은 하이브에서 데뷔한 그룹이 아닌, 소속사인 플레디스가 2020년 하이브의 전신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인수돼 레이블로 운영됐다는 점에서 "탈 하이브"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후 팬덤을 중심으로 "파이브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규탄한다"며 불매 운동이 시작됐다. 한 팬은 결제 취소 인증 후 "제가 할 수 있는 건 추가 구매 취소"라며 "소속사라면 소속사답게 행동하라는 당연한 얘길 하는 것"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최근 K팝 팬덤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만큼, 이에 대한 문제를 당당하게 지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단 소속사뿐 아니라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신이 배신한 사람들'(이하 '나는 신이다') 공개 이후 국내 굴지의 음반 판매처인 신나라레코드가 아가동산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나라 레코드 불매 움직임이 나왔다. 당시 가요 기획사들도 이런 흐름에 동조해 그룹 아이브, 에이핑크, 이채연 등도 신나라레코드를 판매처 목록에서 제외했다.
불매 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조 화환을 보내며 멤버의 범법 행위를 규탄하기도 한다.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가 음주 상태에서 전자 스쿠터를 운전해 경찰에 입건 됐을 때도 자진 탈퇴를 요구하며 대규모의 근조화환이 소속사인 하이브 앞으로 배달됐다. 슈가는 결국 자필 편지까지 올리며 팬심 달래기에 나섰다. 슈가는 지난 9월 27일 벌금 1500만원을 확정받았다.
한 관계자는 "과거엔 팬덤 하면 '맹목적인 사랑과 지지'였다면, 최근에는 성향이 조금 달라진 모습"이라며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던 스타라도 범죄 행위를 하면 언제든 규탄하고, 소속사에도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작은 일에도 과열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지만, 팬들이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면서 구태의연하게 해오던 업계의 부정적인 행태들과 부조리가 변화한 것도 사실"이라며 "제작사나 엔터 회사들이 팬들의 반응이나 여론의 동향에 대해 더욱 신경쓰고 섬세하게 일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소비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시키는게 '불매'라는 점에서 팬덤의 행동은 일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며 "가수나 소속사에서 '불매'를 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엔 그 집단 행동으로 과도하게 소속사나 가수를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는 우려도 있다"며 "최근엔 팬덤의 영향력도 커진 만큼 그 힘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보다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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