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크게 올랐을 때 한전이 (인상분을) 떠안으면서 대기업과 국민 경제는 (한전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당시 공기업이 안았던 부담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은 경제 주체들이 환원한다고 생각해 주십시오."(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
우리나라에서 전기요금을 제일 많이 내는 곳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삼성전자입니다. 국내 최대 기업이자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답게 지난해 3조2637억원을 전기요금으로 냈습니다.
최근 들어 글로벌 경쟁에서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이는 삼성전자로서는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일 텐데요. 내년부터는 전기요금으로만 3800억원을 더 내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부와 한국전력공사가 기업용 전기요금만 10% 올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23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은 산업용 전기요금을 평균 9.7% 올린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반 가정과 영세 사업자들이 사용하는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은 동결했습니다. 산업용 전기요금도 기업 규모에 따라 인상률을 차등화했습니다. 대기업은 킬로와트시(㎾h) 당 평균 181.5원으로 10.2%(16.9원), 중소기업은 177.4원으로 5.2%(약 8.5원) 올렸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번 인상으로 중소기업의 전기요금은 연 평균 100만 원 미만, 대기업 전기요금은 연 평균 1억1000만 원 안팎에서 오를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올린 이유는 전기료 수입으로 먹고사는 한전의 재무상황이 극도로 나쁘기 때문입니다. 한전은 202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41조 원의 누적 적자(연결 기준)를 기록했습니다. 올 상반기 현재 부채는 203조 원으로 하루 이자 비용만 122억 원에 달합니다.
그런데 왜 기업용 전기요금만 올렸을까요. 요금 인상의 영향을 받는 고객을 최소화하면서 한전의 재무구조 개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게 한전의 설명입니다. 기업 고객은 한전 전체 고객의 1.7%(약 44만 개)에 불과하지만 전체 전력의 53.2%를 사용합니다. 특히 대기업은 전체의 0.1%에 불과하지만 전력 사용량은 48.1%를 차지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우리나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6개 나라 가운데 26위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악' 소리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경기 둔화와 '3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 중국의 저가 공세로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전기요금 인상까지 떠안았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철강,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전기 사용량이 많은 국가 기간산업이 더 큰 부담을 안았습니다.
정부와 한전이 전기요금을 올린 것은 작년 11월 이후 1년 만입니다. 작년 11월에도 '서민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주택용과 일반용 전기요금은 동결하고 대기업의 전기요금만 4.9% 올렸습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1년도 안 돼 전기요금이 또 오른 것입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력 사용 상위 20개 기업의 연간 전기료는 지난해 12조4530억원에서 13조8796억 원으로 1조4266억 원 늘어납니다. 기업 전기요금 순위 가운데 눈길을 끄는 회사가 현대제철입니다.
매출 규모는 국내 10위지만 지난해 지불한 전기요금은 1조84억 원으로 3위입니다. 국내 최대 제철소인 포스코가 지난해 5028억 원의 전기료를 낸 것에 비하면 두 배 많은 전기료를 냈습니다.
포스코가 용광로(고로)를 주로 사용하는 반면 현대제철은 폐철인 철스크랩을 전기로 녹여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전기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전기로 11기를 보유한 현대제철은 원가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중(10% 이상)이 가장 높은 대기업 중 하나입니다.
전기요금 인상에 따라 현대제철은 내년에 1166억원의 전기료를 더 내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올 상반기 영업이익(1538억 원)의 75.8%에 해당하는 돈을 전기료로 뿌려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현대제철이 미국에 전기로 공장 건설을 검토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국내 전기값의 급격한 인상”이라며 “미국의 높은 인건비를 감안해도 미국에서 사업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년째 적자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디스플레이 기업들도 전기료 인상에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올해 1862억원 영업적자가 예상되는 LG디스플레이는 앞으로 연간 전기료를 934억 원(지난해 8075억 원→9009억 원) 더 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용 전기료를 동결한 건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2020년 12월 기준 대형 제조업체의 산업용 전기료(300㎾ 이상)는 ㎾h 당 94.3원이었습니다. 이후 여덟 차례나 산업용 전기료가 올라 4년간 70% 이상 뛰었습니다.
같은 기간 가정용 전기는 35.9%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h 당 전기요금 역시 가정용이 149.8원으로 대기업(181.5원)보다 낮습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 학장은 “산업용 전기는 이미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공급되고 있다”며 “원가 대비 60% 수준에 공급되는 가정용을 올리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요금이 OECD 하위권이라지만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나라인 미국과 대만보다 높습니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평균 요금은 ㎾h 당 179.5원으로, 지난해 기준 미국 전역의 평균 전기료(112원)보다 60.3% 비쌉니다. 한국 기업이 여럿 진출한 텍사스주(77.6원)와 조지아주(83.4원)에 비하면 두 배 이상입니다.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립과 경기 평택·용인 반도체 공장 완공 등으로 전기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기료를 인상하면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에서 전기료를 가장 많이 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송배전망 비용까지 자체 부담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발전소에서 전기를 제대로 끌어오지 못해 선로를 땅에 묻는 지중화 작업에만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전력 여유가 있는 충남 태안에서 용인까지 송전망을 구축하는 방안을 논의 중입니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를 수십 곳 유치한 일본, 인도, 대만과 제자리걸음인 한국의 결정적 차이는 전기료와 송배전망 경쟁력”이라며 “송배전망까지 지어야 하는데 전기료까지 인상되면 글로벌 기업의 외면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이전도 가속화할 전망입니다. 낮은 전기료는 직접 보조금과 함께 미국이 해외 기업을 유치할 때 쓰는 핵심 카드가 됐습니다. 전기료가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인이 되자 유럽도 전기료 인하에 나섰습니다.
독일이 대표적입니다. 치솟는 전기료(㎾h 당 370.3원)에 제조업체들이 떠나자 독일 정부는 지난해 11월 전기료에 부과되는 세금을 97% 감면하기로 했습니다. 높은 법인세율과 과도한 규제에 더해 지난 4년간 70% 넘게 오른 전기료는 국내 기업의 ‘탈(脫)한국’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주택용 전기요금은 동결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부채가 203조 원인 한전은 매일 이자로만 122억 원을 물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전은 막대한 규모의 한전채 등을 발행해 버티고 있습니다.
공기업인 한전의 비용 부담은 결국 정부 재정, 즉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습니다. 전기요금은 오르지 않지만 세금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조삼모사일 수 있는 셈입니다.
물가도 들썩일 수밖에 없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용 전기요금만 올리기 때문에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CPI)를 계산할 때는 동결한 주택용 전기요금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은 "산업용 전기를 쓰는 대기업의 수출 물가가 일부 영향을 받지만 원가에서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3~1.4% 정도이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자동차, 휴대폰, TV 등 소비재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를 간접적으로 올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2013년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요금이 5% 인상되면 소비자물가지수가 0.26% 오릅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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