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무게를 줄일 수 있어 ‘신의 금속’으로 불리는 고장력 강판을 10년 넘게 연구한 40대 연구원 A씨. 그는 최근 경기 판교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중국 바이어 B씨에게 중국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A씨는 이직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B씨는 언제든 연락하라며 회사 소개서를 건넸다. A씨는 “꿈도 못 꿔본 연봉에 자녀들 국제학교 학비, 양가 부모님 건강검진(1인 500만원대), 가사도우미까지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귓가에 맴돈다”며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말했다.
3일 과학계에 따르면 한국의 우수 인재를 빼가려는 중국의 움직임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연봉은 세 배가 기본인 데다 50평(165㎡)대 아파트, 통역 지원, 연 여섯 차례 한국에 오갈 수 있는 왕복 항공편, 세금 대납 등 갖가지 혜택을 제시한다.
과거엔 대기업에 접근해 기술 유출을 대가로 거금을 건넸지만 최근엔 대기업 계열사나 중소·중견기업, 대학, 연구소 등으로 공략 대상이 다양해졌다. 중국 헤드헌터들은 연구개발(R&D) 인재들이 모인 판교, 테헤란로, 대덕연구단지에서 대놓고 영입전을 펼치고 있다. 해외 유명 학회에 참가한 특정 교수를 영입하기 위해 현지에 방문하는 ‘핀셋 헌팅’도 벌어진다.
유럽이나 미국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우회 제안’을 하는 것도 새롭게 나타난 양상이다. 서울대에 재직 중인 한 교수는 “중국이 투자한 유럽 관계사로 이직한 다음 3년 뒤 중국 본사로 옮기는 방안을 제시했다”며 “미국에 중국 자본으로 스타트업을 차리고 그리로 유도하기도 한다”고 했다.
천인계획 인재는 중국에 연구 노하우를 전수할 ‘혁신 인재’와 선진 경영 시스템을 이식할 ‘창업 인재’ 두 유형으로 나뉜다. 영입 대상에 오른 인재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연봉과 연구 자율성, 어드바이저로 노후 취업까지 사실상 백지수표를 보장받는다. 대신 연구 성과를 중국 정부에 우선 공유해야 한다. 지금까지 7000명 정도의 해외 중국계 과학자와 교수, 기업인들이 천인계획에 따라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서울대와 KAIST 등 10여 명의 인재가 천인계획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인재 유출을 우려한 각국의 반발을 감안해 천인계획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는 게 과학계의 설명이다. 프로젝트 명칭이 ‘계몽 계획’ ‘고급 외국인 전문가 유치 계획’ 등으로 수시로 바뀔 뿐 인재 빼가기 행태는 그대로다. 한국에 중국 인재 브로커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 기술 유출 피해를 막기 위한 근거로 산업기술보호법이 있지만 이 법에는 알선, 중개 및 소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다.
일각에선 중국의 전략이 시장 논리에 맞다는 얘기도 나온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 곳으로 인재가 몰리는 건 자본주의 체제에서 당연한 일이라며 한국의 기업과 연구소도 보상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윤의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특임교수는 “애국심에 호소해 인재를 묶어둘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며 “정부가 우수 인재 유출을 막을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이미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기정통부가 지난 2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심의·의결한 ‘2022년도 기술 수준 평가 결과’에 따르면 국가별 기술 수준은 1위인 미국을 100%로 봤을 때 유럽연합(EU) 94.7%, 일본 86.4%, 중국 82.6%, 한국 81.5% 순으로 나타났다. 직전 2020년도 조사에서는 한국이 80.1%로 중국(80%)에 근소 우위를 지켰지만 2년 만에 역전을 허용했다. 정보통신기술(ICT)·소프트웨어(SW), 기계·제조, 우주·항공 등 11대 분야 136개 기술을 대상으로 평가한 결과다.
ICT·SW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 수준은 2012년 67.5%에 불과했지만 2022년 87.9%로 큰 폭으로 성장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82.2%에서 82.6%로 0.4%포인트 성장하는 데 그쳤다. AI, 반도체·디스플레이, 양자, 수소 등 국가전략기술 분야 세부 평가에서도 중국은 86.5%를 기록해 한국(81.7%)을 뛰어넘었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 8월 인사청문회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하며 “중국이 AI 부문에서 일본과 유럽보다 앞선 이유는 수십 년 동안 2만 명 이상을 국비로 뽑아서 미국에 보내 교육했기 때문”이라며 “대한민국으로선 위기인데 국민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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