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준국가기구다.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이사장도 권력이 낙점한다. 당혹스런 전개에도 시장, 정부, 정치권 공히 무덤덤한 점이 더 씁쓸하다. 어느덧 간섭과 개입에 순치된 우리 경제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터다.
요 몇 년 새 국민연금은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들어 상왕 노릇이다. 초일류 삼성전자마저 주총 때마다 국민연금 눈치부터 살핀다. 경계현, 이상훈 등 최고경영자 선임 때도 국민연금이 반대해 조마조마한 표 대결을 벌여야 했다.
한국 간판 기업의 미래 전략까지 뒤흔든다. SK는 두어 달 전 그룹 명운을 걸고 진행한 SK이노베이션과 SK E&S 합병을 국민연금 반대 속에 힘겹게 성사시켰다. LG도 미래 사업으로 점찍은 배터리 자회사 분사 당시 국민연금 반대로 곤욕을 치렀다. 네이버, 카카오 등 신산업 선두 주자도 시시콜콜 국민연금 반대에 맞닥뜨린다.
기업인 공격이 수위를 넘은 지도 오래다. 전가의 보도 격인 ‘주주권 침해 이력’을 들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대표 연임을 저지한 게 5년 전 일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서 조 회장 연임안을 ‘찬성’ 의결해 놓고 불과 보름 뒤 ‘반대’로 돌변했다. ‘스튜어드십을 적극 행사하라’는 대통령 한마디면 충분했다.
민간 기업에 사실상의 ‘관선 이사’를 내려보내는 노골적 장면을 조만간 보게 될지도 모른다. 2021년과 2022년 7개 사에 사외이사 파견(추천)을 추진한 전례가 있다. 삼성물산(지배구조), 포스코·CJ대한통운(산업재해), 4대 금융지주(사모펀드 사태)에 부실 경영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였다. 막판에 무산됐지만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카드다.
위압적이고 낯선 작금의 국민연금은 문재인 정부 작품이다. 집권 2년 차인 2018년 ‘연금사회주의’라는 각계 비판을 외면하고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강행했다. 2년 뒤에는 후속 조치로 자본시장법령을 대폭 손질하며 경영 개입 신작로를 깔았다. 손실(단기 매매차익 반환) 부담 없이 경영에 개입할 수 있도록 ‘10%룰’을 맞춤 수정했다. 결정적인 조치는 ‘5%룰 완화’다. 5% 투자자의 지분 보유 목적에 기존 ‘단순보유’와 ‘경영참여’ 외에 ‘일반투자’를 신설했다. 일반투자에는 임원 해임, 배당제안, 정관변경 요구 등 여러 경영 개입 권한을 부여했다. ‘중점 관리 사안’을 정해 회사 측과 비공개 대화를 진행하고 수시로 자료 및 정보를 청구하는 것도 허용했다.
2020년 2월 완화된 5%룰이 시행되자마자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가 무더기로 일반투자로 분류됐다. 이듬해 현대자동차 LG 등도 같은 일을 겪었다. 시총 30대 기업 대부분을 포함해 일반투자 지정 종목은 수시로 100곳을 넘긴다. 훈수와 간섭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이통 3사, 4대 금융지주, 양대 플랫폼 등 업종별 일괄 지정도 잦다.
국민연금 빅브러더화 논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댓글 조작범 드루킹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정책은 그의 구상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드루킹은 2008년부터 국민연금을 활용해 재벌 오너를 축출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재벌 국유화’가 진정한 경제민주화라는 이 망상에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관심을 보이며 댓글 조작으로 이어졌다는 게 법원 판단이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국민연금의 광범위한 경영 간섭권은 위헌적이다. ‘국가는 사영기업 경영을 통제·관리할 수 없다’는 게 헌법(126조) 정신이다. 다행히 윤석열 대통령,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개입을 자제하는 기류다. 올 들어 50여 곳의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로 낮췄다. 하지만 스튜어드십코드는 언제든 정권 코드로 오염될 수 있다. 주주가치 훼손을 막기 위해 국민연금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무책임하다. 행동주의가 중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올렸다는 입증은 국내외 어디에도 없다. 한국 경제에 드리운 드루킹의 음습하고 거대한 그림자를 직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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