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머리 전략계획, 노예적 근면성...천천히 망하는 길[박찬희의 경영전략]

입력 2024-11-09 20:03   수정 2024-11-09 20:04

[경영전략]



30여 년 전 모 대학의 졸업사진 촬영에서 벌어진 일이다. 주차시설이 제대로 없어서 건물 앞에 차를 세우던 시절인데, 경영학과 학생들은 주차된 차들을 힘을 모아들어서 옮기고 경제학과 학생들은 적당한 장소로 이동해서 사진을 찍었다. 대학 커리큘럼이라고 별로 특별한 것도 없던 시절 ‘환경을 극복하라’, ‘한계에 도전하라’와 같은 말을 4년 동안 듣다 보니 기업가적 용기를 애써 흉내라도 내본 것 같다.

들어서 옮기던 중 범퍼를 깨트린 차가 있었는데 그 주인이 하필이면 경제학과 교수님이었다. 사정을 설명하니 교수님은 “경제학은 세상을 바꾸는 공부인데 예산 제약, 최적화를 배우는 순간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노곤한 인간이 되는 것은 한심하다”며 한계를 넘어서 뭐라도 해보려던 ‘경영자적 패기’를 칭찬해 주셨다. 학생들은 행정실에 찾아가 읍소 50%, 항의 50%로 학교가 그 교수님께 보상 처리를 하게 만들었다.

차를 피해 가지 않고 들어서 옮기고 명분과 인간적 호소를 더 해서 피해보상을 풀어낸 일은 사실 시설관리 제도의 틈을 활용한 면도 있는데 창업경영(entrepreneurship)과 비시장전략(non-market strategy)의 논점들과 일치한다. 놀랍게도 차를 들어서 옮기는데 나섰던 학생들 대부분이 ‘객기 혹은 용기’에 힘입어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필자가 예외인데 쓸데없이 공부를 많이 해서 안 되는 이유만 잘 찾은 결과다).

작게 시작해서 기반을 만들다
L그룹은 소련 해체 후 독립한 나라들에 진출하고자 거액의 컨설팅을 포함한 사업성 조사를 했다. 기자재 관세가 90%에 달하고 외환 배정이 까다로워서 과실 송금이 어려운 데다 부품, 물류 등의 기반도 취약했다.

정책 방향과 규제까지 모호해서 도저히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D사는 그중 한 나라에 작은 무역사무소를 열고 면화 거래를 시작했다. 일단 사업을 시작하니 수출실적에 고무된 현지 정부에서 금, 코발트 등 원자재 사업을 제안했고 최고위층의 한국 방문으로 이어져 자동차 공장을 짓게 되었다. 국책사업이 되니 기자재 수입에 면세 조치가 만들어졌고 가전 조립공장과 통신사업이 더해지며 달러 송금이 트였다.

작은 사업이라도 시작하면 현지 파트너가 생기고 관련 당국과도 접점이 생긴다. 이들은 사업이 잘돼야 돈을 벌든 출세하든 실익을 얻으니 온 힘을 다해 도와줄 수밖에 없다. 공유하는 정보의 수준도 다르다. 현지에서 일하고 살면서 얻는 직간접 체험과 인맥도 정보 자산이고 문제해결의 기반이 된다. 제아무리 비싼 컨설팅을 써도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모호한 정책 방향, 엉터리 규제 환경은 안 되는 일도 없고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부품, 물류가 취약하면 그 사업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는 얘기다. 부실한 금융 환경과 고금리, 외환 배정의 어려움은 비슷한 여건에서 살아온 한국 사람들은 그 방향과 해법을 알고 있는 익숙한 일이었다. 마치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잘 갖춰진 사업 환경에 익숙한 미국, 유럽의 회사들에는 어려운 일이고 관료제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일본 회사들은 엄두도 못 내니 이 또한 경쟁압력을 덜어주는 고마운 일이다.

경영학 책에는 이런 사업의 현실이 유식한 단어로 정리되어 있다. 민츠버그(Mintzberg)는 전략계획이 관료화된 경영자들의 권력 수단이 되는 현실을 지적하고 현장에서 떠오르는 구체적 전략(emergent strategy)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칸나(Khanna)는 시장 기반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제도와 규제에도 불확실성이 큰 개도국의 사업 환경을 제도적 공백(institutional void)으로 정의하고 여러 사업들을 엮어서 대응할 수 있는 사업체제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어진 법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해서 사업의 의미를 설득하고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비시장전략은 제도적 공백이 클수록 더 중요하다.

비딱한 게으름 vs 노예적 근면성
사업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서 일이 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다툼을 해결하는 제도가 생긴다.

빠르고 편하게 이동하고 싶은데 마땅한 수단이 없으니 자동차를 만들고 이어서 안전 규제와 도로교통 규칙이 갖춰진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뛰거나 말을 잘 키워서 타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해결이다.

빨래하기 싫은 사람이 많으니 세탁기가 나오고 전기수요가 늘면 발전사업이 성장한다. 여유시간이 늘어나면 영화산업의 기반이 생긴다. 시키는 일 열심히 하는 노예적 근면성이 아니라 게으른 사람들의 욕망과 세상을 남다르게 보는 비딱한 사람들의 도전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사람들을 연결해서 없던 시장을 만들어도 가치가 나온다. 고대 중국에서는 이를 상(商)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는데 무역으로 시장이 넓어져서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하고 만드는 실력도 는다. 플랫폼 경제에서 더 많은 사용자와 사업자가 모여서 만드는 네트워크 효과도 마찬가지다.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거래를 열고 금융, 운송 같은 관련 사업들을 모아서 판을 만든 결과이다. 고대 실크로드가 이렇게 만들어졌고 21세기 세계적 범위의 에너지, 정보통신, 반도체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노예적 근면성이다. 힘없는 사람들 고혈을 짜서 수지를 맞춰봐야 천천히 망할 뿐이다. 책상머리에서 안 되는 이유만 찾으면 그 틀을 만든 힘세고 영악한 사람들의 노예가 될 뿐이다. 정치가 정책을 만들고 그 틀에서 경영하는데 억울해도 꾹 참고 순진한 백성에 그치면 단물만 뽑힌다. 옳고 그름을 밝히고 더 나은 대안을 설득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비시장전략이다.

창업 경영과 비시장전략
‘XX관리’로 가득한 경영학 커리큘럼은 자칫 노예적 근면성만 들이대며 천천히 망하는 교본이 된다. 창업 경영 혹은 기업가정신은 이런 책상머리에서 안 되는 이유만 찾는 한심한 짓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다.

창업 경영(entrepreneurship)의 대표적 정의는 ‘한계를 넘는 도전(beyond limit)’이다. 대기업 경영자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면 창업 기업가이고 작은 가게 주인도 하던 것에 머물러 시간 보내면 아니다. ‘창업 경영=IT’라는 생각은 우리나라 벤처 정책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G그룹의 관리 책임자는 ‘잘못된 사업’을 막는 수비수로 유명하다. 10조원 벌어도 1조원 남기기 힘든데 5조원 투자가 잘못되면 망한다는 주장인데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면 죽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힘없는 사람들 고혈을 짜며 군기 잡는 경영, 회사를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해서 사내 권력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천천히 망하며 귀족으로 살자는 대주주의 깊은 뜻이라면 대단한 혜안이지만 기업사냥꾼에게는 먹잇감 0순위다.

경영권 보호장치가 천천히 망하며 누리려는 분들을 위한 성벽이 된다면 주주는 그 밑천 대주는 바보가 되고 정부는 눈치껏 망봐주는 경비원이 된다. 차라리 지분 팔고 맘 편하게 더 신나게 누리게 돕는 편이 낫다.

주가와 배당보다 회사 이권을 파먹는 편이 낫다면 그런 틀부터 없앨 일이다. 창업의 간판을 붙여서 나랏돈 퍼다 나눠 쓰는 분들 때문에 정작 사업하는 사람에겐 돈이 안 간다면 이 또한 도둑질이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경영자가 많아야 잘사는 나라가 된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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