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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수십년간 함께 살아온 사실혼 배우자가 있었다. 해외로 이주해 연락이 끊긴 동생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A씨가 세상을 떠났다. A씨는 생전에 "내 재산은 모두 사실혼 배우자에게 준다"는 내용을 컴퓨터로 타이핑해 서명한 유언장을 남겼다. 하지만 이 유언장은 법적 효력이 없다. 결국 A씨의 전 재산은 연락 두절된 동생이 상속받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유언의 자유? 그러나 까다로운 법적 요건
우리 민법은 헌법상 보장되는 재산권 및 사적자치의 원칙에 따라 유언의 자유를 인정한다. 유언이 있다면 그 내용이 법정상속에 우선하기 때문에 유언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내용으로 '상속설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법이 정한 엄격한 요건 내에서만 가능하다. 민법이 인정하는 유언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다섯 가지뿐이다.
대법원은 “민법 제1065조 내지 제1070조가 유언의 방식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대법원 2006. 3. 9. 선고 2005다57899 판결 등). 유언의 법정 요건이 유언자의 진의를 깰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자필증서 유언을 하면서 도장 대신 서명만 했다거나, 작성일자 중 '일'을 빠뜨린 경우에도 유언은 무효가 된다. 비밀증서 유언을 하고 법정기한을 넘겨 확정일자를 받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A씨가 작성한 타이핑 문서는 이러한 법정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기에 무효가 된 것이다.
구제 방법은 있다…'무효행위의 전환'
A씨는 숙고한 끝에 유언장을 작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언장이 무효가 된다면, A씨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사실혼 배우자가 전혀 상속받지 못하는 법률관계가 형성된다. 이는 유언장을 작성한 A씨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애초에 유언에 일정한 방식과 요건을 요구한 목적이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에도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문제가 있다.그렇다면 A씨의 진정한 의사는 영영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 다행히도 해결책이 있다. 바로 '무효행위의 전환' 법리다. 이는 특정 행위로는 무효인 법률행위가 다른 행위의 요건을 갖췄고, 당사자가 그 무효를 알았더라면 다른 행위를 의도했으리라 인정될 때, 그 다른 행위로서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무효인 유언을 '사인증여 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사인증여는 증여자가 사망할 때 효력이 발생하는 증여 계약이다. 계약인 만큼 유언과 달리 형식적 요건이 없다. 계약의 성립요건인 청약과 승낙도 반드시 명시적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A씨의 경우, 유언장 작성 시 사실혼 배우자가 함께 있었거나, 유언장 작성 후 사실혼 배우자에게 유언장 내용을 알렸다면, 이를 청약과 승낙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인증여 계약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A씨가 원했던 대로 재산이 사실혼 배우자에게 이전되는 것이다.
최근 대법원의 신중한 입장
종래 대법원은 무효인 유언을 상당히 관대하게 사인증여로 인정해왔다. 이는 유언의 요건에 관해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유언자의 진의를 확인하고도 전혀 다른 법률관계를 인정해야만 했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은 이러한 전환 인정에 신중한 모습이다. 대법원은 "유언을 하는 자리에 동석했던 일부 자녀와의 사이에서만 청약과 승낙이 있었다고 보아 사인증여 효력을 인정하면, 망인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고 다른 상속인들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는 한번 무효가 된 법률관계를 되살리는 것이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위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고려하면, 유언자가 유언이 무효인 경우에도 수증자에게 재산이 이전되도록 할 의사가 분명하고 수증자가 유언자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승낙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볼만한 추가적인 언동이 있는 경우에만 사인증여 계약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형식적 하자로 유언이 무효가 되더라도, 사인증여 계약으로 인정받아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따라서 유언장이 발견되면 단순히 요건 충족 여부만 볼 것이 아니라, 구체적 정황을 토대로 사인증여 계약 성립 가능성까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처음부터 법정 요건을 충족하는 적법한 유언을 작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작성된 유언이 무효로 밝혀진 경우라면, 사인증여 계약으로의 전환은 고인의 마지막 뜻을 실현할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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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웅규 법무법인(유한) 바른 파트너 변호사ㅣ 서울대 법학대학 학사, 동 대학원 석사(민법/신탁법 전공)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에서 1년간 연수했다. 상속자문·상속분쟁·기업승계 등 자산관리와 자산승계 분야 전문 변호사로 대기업 및 중견·중소기업 오너 일가의 상속재산분할, 유류분 반환청구 등 다수의 상속분쟁 및 상속자문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국내 최초로 로펌 내 종합자산관리센터인 'Estate Planning Center'의 설립을 주도하여 현재 자산승계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다. 중견기업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삼성전자, 삼성생명,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성균관대, 부산외국어대 최고국제경영자과정(AMP), 전미한인공인회계사협회, 어바인 한인상공회의소 등에서 많은 강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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